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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나무에 내리는 눈

울프팩 2013. 10. 31. 09:01

스콧 힉스 감독의 '삼나무에 내리는 눈'(Snow Falling On Cedars, 1999년)은 미국의 아픈 역사에 메스를 들이 댄 영화다.
그것도 인디언 학살이나 노예제처럼 먼 옛날이 아닌 그리 얼마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 과거의 상처다.

이 영화는 미국이 미국 시민을 어떻게 다루었는 지 치부를 드러낸 작품이다.
어찌보면 다인종 다민족 국가인 미국의 딜레마를 여실히 보여준 셈이기도 하다.

내용은 1950년대 어느 바닷가 마을에서 주검이 발견되면서 마녀 사냥처럼 미국 시민권자인 일본인 젊은이가 살인범으로 몰리게 된 이야기다.
당시 미국은 일본을 상대로 제 2 차 세계대전을 치른 지 얼마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니 사실 여부를 떠나 일본인 피의자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 리 없다.
오히려 일본계 젊은이는 적성국 출신이어서 받을 수 있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전쟁 중 미 육군 장교로 복무하며 죽기 살기로 싸웠다.

그럼에도 돌아온 전쟁 영웅을 바라보는 미국 백인들의 시선은 결코 곱지 않다.
일본인 피의자를 앞에 두고 재판장은 공판을 진행하며 배심원과 청중들에게 한마디 한다.

"내일이 진주만공격이 있은 지 9주년 되는 날입니다. 그러나 본 재판은 이와  무관하다는 점을 알립니다."
오죽했으면 이런 말을 할까.

모든 정황은 일본계 젊은이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아무도 진실을 캐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그런 그들에게 구세주로 나선 존재는 젊은이와 결혼한 일본 여성과 과거에 사랑했던 백인 청년이다.

그가 행동에 나설 수 있었던 힘은 지방지 기자였던 아버지가 생전에 남긴 글 한자락이었다.
"우리가 서로의 눈을 쳐다보면서 명예롭게 행동했다고 자부할 수 있도록 하자."

영화는 증오와 갈등으로 대립했던 과거의 아픈 상처를 보여주지만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반성하는 모습도 함께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정작 힉스 감독이 얘기하고 싶었던 것은 잘못을 바로 잡으려는 용기다.

실제로 미국은 이를 실천에 옮겼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이 있고 나서 미국은 일본내 거주하던 약 12만 명의 일본인을 미국내 7개주에 걸쳐 수용소를 짓고 분산 수용했다.

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이지만, 일본과 내통해 기밀을 빼돌리고 미국내에서 소요를 일으킬까봐 우려한 조치다.
전쟁이 끝난 뒤 수용소는 철거되고 사람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지만 미국은 그것으로 일단락짓지 않았다.

1970년대 제럴드 포드 전 대통령은 한때 일본인을 수용소에 가뒀던 점에 대해 공개사과했다.
그로부터 10여년 뒤,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은 수용자에 갇혔던 생존자들에게 1인당 2만달러씩 배상하는 법에 서명했고, 뒤를 이어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은 생존자들에게 일일이 편지를 보냈다.

"아픈 기억을 갖게 한 데 대해 미국 정부는 사과를 드린다.
잘못된 과거를 다시 되돌릴 수 없지만, 우리는 당신들에게 저지른 잘못을 인정해 정의를 바로 세우려 한다."

비록 오랜 세월이 걸렸지만 미국은 정의가 무엇인 지 제대로 보여줬다.
명명백백한 위안부 강제동원과 강제징용, 역사침탈을 부인하고 사과를 할 줄 모르는 후안무치한 일본 정부와 위정자들의 행동과 너무 대비된다.

영화는 이처럼 무거운 역사적 배경을 깔고 있다.
힉스 감독은 결코 다루기 쉽지 않은 주제인데도 너무나도 정갈한 영상과 미스테리한 분위기로 잘 살렸다.

특히 아름다운 풍경 속에 펼쳐지는 이뤄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가슴 한 켠이 아리게 만든다.
에단 호크의 연기도 좋았고 일본 여성을 연기한 유키 쿠도, 이 작품으로 데뷔한 한국계 배우 릭 윤도 분위기 있는 연기를 보여줬다.

다만 위기에 처한 일본인들은 결국 그들의 힘으로 자신들을 구하지는 못한다.
그저 백인의 온정이 베푼 결과일 뿐이어서 한 켠으로 씁쓸하다.

어쩌면 그것이 미국에서 살아가야 하는 동양인들의 현실일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직한 주제를 밀도있게 다룬 내용이나 아름다운 영상 등이 돋보이는 아주 우수한 작품이다.

2.35 대 1 애너모픽 와이드스크린을 지원하는 DVD 타이틀은 화질이 지글거림이 보이는 등 아쉽다.
음향은 돌비디지털 5.1 채널을 지원하며 감독의 음성해설과 삭제장면, 제작과정 등 다양한 부록이 들어 있으나 한글 자막을 전혀 지원하지 않는다.

<DVD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제 2 차 세계대전은 다민족 다인종 국가인 미국이 심판대에 오른 역사적 사건일 수 있다. 이 영화는 그런 배경을 깔고 있다.
영화는 소설처럼 워싱턴주의 푸젯사운드 북쪽에 위치한 샌피드로에서 촬영.
1995년 데이비드 구터슨이 쓴 원작 소설은 30개국어로 번역돼 400만부 이상 팔렸다.
살인 누명을 쓴 일본계 미국 청년의 아내를 연기한 유키 쿠도. 가수 겸 배우인 그는 12세때 도쿄 길거리에서 캐스팅됐다.
이 영화가 데뷔작인 한국계 미국인 릭 윤은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나 이듬해 미국으로 이민간 뒤 세인트존스 군사학교와 MBA로 유명한 펜실베이나대 와튼스쿨을 나왔다. 1995년부터 3년간 월스트리트에서 선물투자 등 주식중개인을 했고 모델로 데뷔했다.
갈색과 회색이 주조를 이루는 영상은 대단히 아름다우면서도 아주 섬세하다. 나뭇잎을 타고 흐르는 빗물, 딸기를 먹는 입술 등은 탐미적이면서 에로틱하다.
영화 본편의 한글 자막에 여러 군데 오자가 보인다.
내부의 적으로 의심받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미국내 수용소에 있던 청년들은 충성심을 보이려고 자원입대했다. 일본계 미국인으로 구성된 442연대는 프랑스와 이태리에서 9,000명이 넘는 사상자를 낼 만큼 치열하게 싸웠다.
살인범으로 내몰린 아들을 둔 아버지는 캐리 히로유키 다가와가 연기. 그는 1950년 부친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동안 도쿄에서 태어났다. 모친은 배우였다. 나중에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마지막 황제'에서 환관으로 출연해 이름을 알렸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 후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국에 살던 11만7,000명의 일본인을 아리조나, 아칸사스, 캘리포니아, 콜로라도, 아이다호, 유타, 와이오밍 등 7개주에 건설한 수용소로 강제 이주시켰다.
그 중 캘리포니아에 있던 일본인 수용소를 만자나르라고 불렀다. LA 북쪽 212마일 지점에 있던 이 곳은 1942년 3월에 문을 열었고, 나무로 만든 16개 막사로 구성됐다. 수용소는 철조망과 감시탑을 세우고, 내부에 학교 병원 세탁소 교회 등이 있었다. 전후 수용소는 철거됐다.
잿빛 유리너머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은 영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연상케 한다.
원작 소설가인 구터슨은 푸젯사운드의 베이브릿지섬에서 15년을 살았다. 1942년 당시 그곳에는 많은 일본인이 살았다.
캐나다의 브리티시컬럼비아주 그린우드 마을을 샌피드로 어촌 마을로 설정해 촬영. 이 곳은 주민이 800명 정도 되는 작은 마을이다.
영화 '샤인'으로 유명한 스콧 힉스 감독은 아프리카 우간다에서 태어나 10세때까지 케냐에서 자랐다. 이후 가족이 영국을 거쳐 호주 아델라이데로 옮겨갔다.
못다한 과거의 사랑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는 청년은 에단 호크가 연기.
항구는 워싱턴의 콜럼비아강 어구에 자리잡은 캐슬라메트 마을에서 촬영.
"사랑해요. 동시에 사랑하지 않아요." 사랑했던 일본 여인이 보낸 마지막 편지는 환경이 만든 애절한 이별을 담고 있다. 결국 주인공은 아픈 과거와 시린 사랑의 추억도 모두 눈 속에 묻고 돌아선다. 눈이 모든 것을 덮으리라 믿으며.
삼나무에 내리는 눈 1
데이빗 구터슨
삼나무에 내리는 눈 2
데이빗 구터슨
삼나무에 내리는 눈 (1disc)
스콧 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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