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73년부터 71년까지 3년 동안 이탈리아를 남북으로 종횡무진 누빈 스파르타쿠스 사건을 가리켜 로마에서는 스파르타쿠스 전쟁이라고 불렀다.

그도 그럴 것이, 단순 노예들의 반란이라고 보기에는 수 만명이 결집할 만큼 세력이 컸고, 노예 뿐 아니라 빈민 부랑아 등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로마인들이 남긴 기록에 그의 이야기는 몇 줄 남아 있지 않다.

이유는 한 가지, 스파르타쿠스는 로마의 수치였기 때문이다.

 

스파르타쿠스는 로마의 수치

 

당시까지 로마 제국은 승승장구하며 유럽 전역부터 아프리카까지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크고 작은 내분이 있긴 해지만 제국의 존망이 위협받을 만한 사건은 별로 없었다.

 

그러던 차에 스파르타쿠스가 검투사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로마의 턱 밑까지 위협했다.

당황한 로마는 겔리우스와 렌툴루스 등 두 명의 집정관을 모두 반란 진압에 투입했다.

 

두 명의 집정관은 각 2개군단씩 1만5,000명을 이끌고 출진했다.

내부의 이견으로 둘로 갈라진 스파르타쿠스 무리 중에 크릭수스가 이끈 3만의 반란군은 가르가노산에서 로마군에 패해, 크릭수스를 비롯해 대부분이 전사했다.

 

하지만 스파르타쿠스는 달랐다.

2명의 집정관이 분리되도록 유인해 각개격파하는 전술로 물리쳤다.

 

이에 로마 원로원은 황급히 로마 최고의 부자이면서 정치적 야심이 대단한 법무관 크라수스를 급파했다.

무려 8개 군단의 5만명으로 편성된 크라수스의 군대는 스파르타쿠스를 추격했다.

 

승승장구하며 알프스 산맥까지 다다랐던 스파르타쿠스는 이때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벌였다.

그대로 산맥을 넘어 북으로 달아났다면 잡히지 않았을 텐데, 돌연 방향을 틀어 이탈리아 남부로 향했다.

 

역사가들은 시칠리아를 정복해 안착하자는 반란군들의 요구를 스파르타쿠스가 꺾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시칠리아를 코 앞에 둔 상황에서 스파르타쿠스는 돈을 받고 메시나 해협을 건네주기로 약속한 킬리키아 해적들의 배반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할 수 없이 스파르타쿠스는 장화 코처럼 생긴 이탈리아 남부 레기움에 진을 쳤다.

여기서도 스파르타쿠스는 크라수스의 첫 번째 공격을 물리쳤다.

 

패배에 진노한 크라수스는 공격을 이끈 뭄미우스를 비롯해 로마군에게 10분의 1 이라는 형벌을 내린다.

반란죄에 해당하는 중벌에만 내리는 10분의 1 형벌은 중대원 600명 가운데 10분의 1인 60명을 추첨으로 뽑아서 나머지 540명이 몽둥이나 돌로 때려 죽이는 형벌이다.

 

동료를 쳐죽이는 가혹한 형벌을 통해 크라수스는 군기를 다잡았다.

이후 스파르타쿠스는 험준한 아스프로몬테로 4만의 반란군을 이끌고 올라 갔으나, 식량 부족 등 여러가지 이유로 산을 내려와 마지막 결전을 벌였다.

 

이 곳에서 스파르타쿠스는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포로로 잡힌 6,000명은 모두 십자가형으로 죽어갔으며, 로마로 향하는 아피아 가도에 본보기로 수 년 동안 꽂혀 있었다.

 

좌파의 영웅, 좌파의 영화

 

스파르타쿠스는 지배 체제에 항거한 대표적 인물로 떠오르며 마르크스 이후 사회주의 사상가들 사이에서 영웅으로 재해석됐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몸담았던 독일의 사회주의 혁명을 꿈꾼 단체 이름도 스파르타쿠스단이었다.

 

그만큼 스파르타쿠스가 좌파에 미친 영향이 지대한데, 특히 할리우드에서 좌파적 색채가 다분한 스파르타쿠스 영화가 제작된 점은 아이러니다.

대표적 사례가 바로 커크 더글라스가 주연 및 제작을 하고 스탠리 큐브릭이 감독한 '스파르타쿠스'가 여기 해당한다.

 

1957년 할리우드에서는 아더 케슬러의 소설 '글래디에이터'를 원작으로 스파르타쿠스의 전기 영화를 기획했다.

주인공은 율 브린너가 내정됐다.

 

아더 케슬러는 스페인 내전 당시 스페인에 건너가 프랑코 군의 동향을 탐지하는 역할을 한 좌파 작가였다.

그가 '글래디에이터'를 쓴 것도 스페인 내전 기간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커크 더글라스는 하워드 패스트의 소설 '스파르타쿠스'를 바탕으로 영화를 준비했다.

뉴욕의 직공 아들로 태어난 패스트는 1943년 미국 공산당에 가입한 좌파 계열 작가로, 스파르타쿠스를 민중 영웅으로 봤다.

 

커크 더글라스의 설득으로 할리우드는 율 브린너 주연의 영화 기획을 포기하고, 대신 더글라스를 지원했다.

하지만 하워드 패스트가 직접 쓴 각본은 영화로 부적절했다.

 

결국 더글라스는 패스트 대신 작가 달톤 트롬보에게 대본을 맡겼다.

달톤 트롬보 또한 미국의 맥카시 열풍 당시 공산주의자로 낙인 찍힌 할리우드의 기피 인물 10인 가운데 하나였다.

 

그 때문에 제작사들의 거부를 우려한 트롬보는 샘 존슨이라는 필명으로 대본을 썼다.

트롬보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패스트의 대본을 모두 뜯어 고쳤다.

 

트롬보는 패스트를 급진 좌파로 봤고, 패스트는 트롬보를 낭만적 성향의 칵테일파티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했다.

트롬보의 대본을 토대로 처음 메가폰을 잡은 인물은 안소니 만 감독이었다.

 

하지만 제작진과 의견 차이로 안소니 만 감독이 물러나고 대신 연출을 맡은 사람이 당시 30세 젊은이로, 무명 감독이나 다름없던 스탠리 큐브릭이었다.

스탠리 큐브릭은 6시간 분량에 해당하는 트롬보의 대본을 다시 또 모조리 뜯어 고쳤다.

 

그러나 자신을 영웅처럼 그려주기를 원했던 커크 더글라스와 싸워 가며 스탠리 큐브릭이 어렵게 만든 영화는 온전히 햇빛을 보지 못했다.

1060년 검열관들이 달려 들어 막판 전투 장면이 잔혹 하다며 대거 잘라냈고, 동성애를 암시하는 장면들도 삭제했다.

 

1994년 지미 해리스가 일부 영상을 복원한 감독판을 내놓을 때 까지 세상은 난도질당한 영화만 봤다.

참고로, 이 영화의 음악을 맡은 알렉스 노스 또한 좌익성향의 작곡가였다.

 

기억되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미국 스타즈 스튜디오에서 TV시리즈로 만든 '스파르타쿠스 : 최후의 성전'은 대미를 장식하는 작품이다.

스파르타쿠스가 로마 군대를 물리친 뒤 마지막 결전에서 최후를 맞기까지 과정을 다뤘다.

 

사실 스파르타쿠스의 역사 기록은 많지 않아 그의 실체를 제대로 알기는 힘들다.

로마인들이 남긴 기록은 단 몇 줄에 불과하며 그나마 그에 얽힌 일화들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은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중에서 크라수스편과, 아피아노스의 '내전기' 등이다.

 

이를 토대로 막스 갈로, 하워드 패스트, 아더 케슬러 등 후대 작가들이 소설로 펴내면서 영웅적으로 그렸다.

우리가 알고 있는 스파르타쿠스의 영웅적 모습들은 후대 작가들의 상상으로 만들어낸 창작이 대부분이다.

 

그 중에서도 막스 갈로의 '스파르타쿠스의 죽음'은 이번 시리즈의 토대가 됐다.

그의 소설이 반란군의 거친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다보니, TV시리즈처럼 선정적이고 폭력적이다.

 

막스 갈로의 소설 중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스파르타쿠스가 포로로 사로 잡은 크라수스의 부관 뭄미우스를 반란군 포로들과 교환하는 대목이다.

그는 교환 대상 중에 싸움을 잘하는 병사가 아닌 글을 쓸 줄 아는 사람들을 지목했다.

 

"기억되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다.

스파르타쿠스는 자신의 투쟁이 그렇게 후대에 전승되기를 바라며 최후를 맞는다.

 

TV시리즈는 막스 갈로의 소설 및 실제 역사 기록을 많이 쫓아갔지만 다른 부분도 적지 않다.

크라수스의 부관을 아들로 설정하고, 율리우스 케사르가 크라수스 군대에 참가한 부분 등은 모두 허구다.

 

스파르타쿠스가 아내를 살해한 로마인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는 설정도 극적 효과를 노린 제작진의 창작이다.

그 바람에 스파르타쿠스의 역사적 의미와 정치적 배경 또한 상당 부분 희석됐다.

 

대신 그 자리를 막스 갈로의 소설처럼 성기 노출도 마다 않는 적나라한 성행위와 사지가 잘리고 피가 튀는 잔혹 영상이 대신했다.

그만큼 자극적이고 볼거리가 풍부해 흥미진진하게 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다만 이런 모습들이 스파르타쿠스의 전부는 아니니, 역사적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관련 서적들을 참고 삼아 읽어보는 게 좋다.

 

블루레이 타이틀은 총 3장의 디스크에 10편의 에피소드를 담았다.

1080p 풀HD의 16 대 9 와이드스크린을 지원하는 영상은 칼 같은 윤곽선과 선명한 색감을 과시하는 등 화질이 우수하다.

 

돌비트루HD 5.1 채널을 지원하는 음향 또한 서라운드 효과가 아주 좋아서 현장감이 잘 살아난다.

부록으로 제작과정, 배우 제작진 인터뷰, 시각효과, 의상디자인 설명 등이 한글 자막과 함께 HD 영상으로 수록됐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내전기'를 쓴 아피아노스는 스파르타쿠스를 로마군에 복무했던 트라키아인으로 보고 있다. 이유는 명확하지 않으나 명령 불복종 등으로 투옥됐다가 검투사로 팔렸다는 추측이다. 트라키아는 지금의 불가리아다. 

작가 MJ 트로우는 로마군에서 복무했던 스파르타쿠스가 같은 트라키아 부족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아 들일 수 없어 탈영한 것으로 보고 있다. 

역사학자들은 트라키아의 왕자설에 대해 당시 트라키아가 여러 부족으로 갈라져 있었고 통일국가가 아니였다는 점에서 설은 설득력이 낮다고 본다. 

기원전 73년 말, 두 차례나 로마군을 격파한 반란군은 사기 충천했다. 그러나 로마군을 얕잡아 본 지나친 자신감이 패인이었다. 

로마군을 이끈 크라수스는 첫 번째 전투에서 스파르타쿠스에게 패한 뒤 등을 보이고 달아난 병사들을 다잡기 위해 같은 중대원끼리 때려 죽이는 10분의 1 형을 내렸다. 이후 그가 이끄는 로마군은 스타르타쿠스의 반란군을 산 속으로 몰아 넣는다. 

드라마에서는 스파르타쿠스가 로마군의 참호와 방벽을 극적으로 돌파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돌파의 댓가는 참혹했다. 로마군은 수 명이 죽고, 반란군은 1만2,000명이 사망했다. 

반란군은 몇 번의 전투에서 로마군을 물리친 뒤 자신감이 충만했으며, 이후 스파르타쿠스와 크릭수스 사이에 의견 다툼이 잦아져 갈라서게 된다. 

스파르타쿠스는 동료였던 크릭수스가 전사한 뒤 이에 대한 보복으로 300명의 로마군 포로들에게 검투 시합을 시켰다. 

스파르타쿠스의 최대 실책은 북에서 남으로 방향을 튼 것이었다. 알프스 산맥을 넘어 그대로 달아났다면 최후를 맞지 않았을 것이란 평가다. 

반란군은 다인종, 다민족으로 구성되다 보니 내부 의견 통일이 쉽지 않았고, 여기에 스파르타쿠스와 크락수스 등 지도부의 의견 분열도 패인으로 꼽힌다. 

스파르타쿠스의 죽음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플루타르코스는 혼자서 포위 당한 채 싸우다 전사했다고 묘사했으나, 아피아노스는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이 때문에 커크 더글라스는 영화 '스파르타쿠스'에서 시체를 찾는 로마군을 향해 포로들이 서로 일어서며 "내가 스파르타쿠스다"라고 외치는 극적 장면을 연출했다. 

당시 십자가형은 주인에게 대든 노예에게 내리는 가장 가혹한 형벌이었다. 로마로 향하는 아피아 가도에 무려 6,000명의 반란군 포로들이 십자가형에 처해져 줄줄이 세워졌다. 

고속 촬영이 가능한 팬텀 카메라로 전투 중에 슬로 모션 화면이 나타나는 극적 효과를 연출했고, 매시브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수 많은 군중을 만들었다.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따르면 스파르타쿠스가 검투사 시절 자고 있을 때 뱀 한마리가 옆에서 또아리를 튼 것을 보고, 같은 트라키아 부족 출신의 여사제였던 애인이 거대한 힘의 징조라고 이야기하면서 이를 상징으로 썼다. 아내같은 애인으로 추정되는 여사제는 TV시리즈처럼 죽지 않고 탈출에 성공해 살아남았다.

크로아티아 랩소디
최연진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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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24 | 애드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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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울프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