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여행

파리의 '더블 O'

울프팩 2015. 10. 24. 12:01

* *play 표시가 있는 사진은 PC에서 play 버튼을 누르면 관련 동영상이 나옵니다.*

 

파리를 가면 빼놓지 않고 봐야 할 두 곳의 더블 'O'가 있다.

바로 오랑주리 미술관(Orangerie Museum)과 오르세 미술관)Orsay Museum)이다.

 

[오랑주리 미술관 앞에 로댕의 조각상 '키스'가 있다.]

 

오렌지 온실이란 뜻의 오랑주리는 원래 추운 겨울 루브르 궁전에서 키우던 오렌지 나무를 보호하는 온실로 사용되던 곳이다.

튈르리 궁전 터에 지은 두 채의 별채 중 하나로, 나머지 한 채는 주드폼 국립미술관이다.

 

혁명 이후 제 3 공화국 시절에는 병사들의 침실과 병기고로 사용되다가 파리코뮌 때 화제로 소실됐다.

이를 나폴레옹 3세가 1852년 건축가 피르맹 부르주아에게 튈르리 궁전의 별채로 설계하도록 지시를 했고, 이를 부르주아의 후계자인 이탈리아 건축가 비스콘티가 완성했다.

 

이 곳은 화가 모네의 연작 '수련'으로 아주 유명하다.

모네는 1918년 11월 제 1 차 세계대전 종전을 축하하기 위해 평생을 그린 수련 2점을 국가에 기증했다.

 

당시 모네의 친구였던 클레망소 수상은 이 그림을 보고 더 큰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한다.

모네는 일반 시민에게 공개하고 자연광으로 감상할 수 있는 장식없는 하얀 공간의 전시실을 요구한다.

 

[천장의 장막을 통해 걸러진 자연광이 쏟아져 들어오는 오랑주리 미술관의 모네 '수련' 전시실.]

 

이후 모네는 타계하기 직전인 1926년까지 총 8점의 수련을 그려서 기증했고, 프랑스 정부는 이를 전시하기 위해 1927년 오랑주리 미술관을 개관했다.

미술관 설계는 건축가 카미유 르페브르가 맡았는데 개관 5개월 전인 1926년 12월 세상을 떠났다.

 

모네가 그린 높이 2미터 크기의 수련 8점을 모두 이으면 100미터 길이에 해당하는 대단한 그림이다.

모네는 이 그림들을 프랑스의 작은 마을 지베르니에 살면서 백내장으로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는 가운데 그렸다.

 

[모네는 1890년 지브레니에 정착해 죽을 때까지 30년 가까이 250편의 수련을 그렸다.]

 

오랑주리에 전시된 모네의 그림은 일종의 전시 원칙이 있다.

동쪽 전시실에 걸린 네 점의 그림은 아침 햇살에 감상해야 하는 그림들이고, 서쪽 전시실에 놓인 네 점은 석양에 보도록 돼 있다.

 

오랑주리는 모네가 요구한 자연광이 그림에 쏟아지게 하기 위해 천장을 하얀 장막으로 덮어서 부드럽게 빛을 걸렀다.

빛 좋은 날은 자연광이 마치 현광등을 켠 것처럼 실내를 환하게 밝힌다.

 

[오랑주리 미술관의 기욤과 장 바르테르 전시실.]

 

수련 전시관 아래쪽에는 미술상인 폴 기욤과 장 바르테르가 기증한 소장품들이 전시돼 있다.

르누아르, 세잔, 마티스, 피카소, 모딜리아니 등 인상파부터 1930년대 근대회화의 대표적 명작 144점이 8개 전시실에 걸쳐 걸려 있어 눈을 즐겁게 한다.

 

입구 전시실에는 작품을 소장했던 폴 기욤 부부의 주거지를 미니어처 형태로 꾸며 놓았다.

이 작품들을 기증한 폴 기욤(Paul Guillaume)은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자동차 정비소에서 일을 했다.

 

[기욤부부의 거주 공간을 작게 만들어 놓은 미니어처. 벽에 그가 수집한 그림들이 잔뜩 걸려 있다.]

 

그는 자동차 정비에 필요한 고무부품을 아프리카에서 수입하면서 아프리카 미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함께 들여온 그림들이 잘 팔리는 바람에 미술상이 됐다.

기욤은 시인 아폴리네르와 알게 되면서 그의 소개로 피카소 등 젊은 미술가들을 많이 알게 됐다.

 

기욤은 능력있으나 가난한 미술가들을 적극 후원하면서 많은 작품을 모으게 됐다.

하지만 기욤은 42세라는 젊은 나이에 의문의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르누아르의 '피아노 치는 소녀' 등 유명 작품들이 많이 걸려 있다. 기욤은 20대 초반까지 미술을 공부했으나 재능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포기했다.]

 

기욤의 소장품은 미망인 도미니카가 상속했다.

도미니카는 부유한 건축가 장 발터와 재혼했으나, 발터도 의문의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이후 도미니카는 입양한 14세 소년이 변사체로 발견되면서 킬러를 고용했다는 혐의를 받고 수사 대상이 됐으나 방면됐다.

일부 언론들은 도미니카가 엄청난 소장품을 국가에 기부하는 조건으로 방면됐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도미니카는 1959년과 1963년 두 번에 걸쳐 소장품들을 정부에 기증했다.

남편들의 이름을 딴 발터 기욤 컬렉션은 1984년 영구 위임됐다.

 

[세느 강변에 위치한 오르세 미술관.]

 

세느 강변에 자리 잡은 오르세 미술관(Orsay Museum)은 루브르 박물관, 퐁피두 센터와 함께 파리의 3대 미술관으로 꼽힌다.

이 곳은 주로 19세기 이후 근대 미술을 전시하는 곳으로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밀레의 '이삭줍기', 마네의 '풀밭위의 점심' 등이 모두 여기 전시돼 있다.

 

이 곳은 특이하게도 오르세 기차역을 개조해 만들었다.

원래 기병대 막사와 오르세 궁이 있었으나 1871년 파리 코뮌 때 화재로 소실됐다.

 

[기차역을 개조한 오르세 미술관은 역사의 내부 골격을 그대로 유지했다.]

 

프랑스 정부는 그 자리에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맞아 건축가 빅토르 랄로에게 의뢰해 호화로운 기차 역을 만들었다.

역사는 20세기 초반까지 호텔과 함께 호황을 누렸으나 열차 크기가 커지면서 1939년 이후 문을 닫았다.

 

한동안 먼지만 쌓여가던 이 곳을 1979년 미술관으로 재활용하자는 의견이 나와 1986년 리모델링을 통해 미술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작품들은 루브르와 주드폼 미술관에서 일부 옮겨왔다.

 

[입구에 들어서면 장 레옴 제롬의 '글라디에이터'가 버티고 서 있다.]

 

파리의 유명 박물관들이 그렇듯 이곳도 오디오 해설을 제공하는데, 대한항공이 2014년 10월 50만 유로를 후원하면서 올해 9월부터 314점에 대한 우리말 해설이 나온다.

 

미술관 위층에는 장식이 아름다운 레스토랑이 있다. 

오르세 미술관 작품 중 유명한 그림인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로뎅의 '지옥의 문'도 여기 있다. 지옥의 문은 로댕 박물관에도 있는데, 두 작품 모두 로댕이 만들었다. 윗 부분에 보면 조그맣게 앉아 있는 유명한 '생각하는 사람'이 보인다. 

오르세 미술관의 명작인 부르델의 '활 쏘는 헤라클레스'. 

학창 시절 미술 교과서에서 본 고흐의 '자화상'을 오르세 미술관에서 직접 봤다. 

오페라 가르니에의 내부를 보여주는 모형도 전시돼 있다. 

밀레의 '이삭줍기'도 오르세 미술관 전시품을 대표하는 명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