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는 광고 문구가 유행한 적이 있다.

그만큼 1등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문구이지만 1등에 무섭도록 집착하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2등도 그럴진대, 하물며 4등은 말할 필요도 없다.

특히 등수가 곧 미래요, 운명인 운동선수들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정지우 감독의 영화 '4등'(2015년)은 제목 그대로 4등이 최고 등수인 어린 수영선수의 이야기다.

초등학교 5학년생인 주인공 준호(유재상)는 열심히 수영 연습을 하지만 대회 성적이 늘 4등에 머문다.

 

수영에 소질이 있고 곧잘 하는데도 성적이 늘지 않자 엄마는 잘 가르친다는 코치를 수소문해 아이를 맡긴다.

한때 한국 기록을 수시로 갈아치울 만큼 주목받는 국가대표였던 수영코치 광수(박해준)는 국가대표 감독의 체벌에 반항하며 뛰쳐나간 뒤 지금은 동네 수영장에서 아이를 가르친다.

 

광수의 교육법은 그토록 싫어했던 국가대표 감독의 방법과 다르지 않다.

바로 혹독한 체벌이다.

 

결국 준호도 코치의 매질을 견디다 못해 수영장을 뛰쳐 나간다.

마치 광수의 복사판 같다.

 

정지우 감독은 준호와 광수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사회의 깊게 뿌리박고 있는 성적주의, 그것도 1등 지상주의를 되돌아 봤다.

과연 1등만이 의미있고 1등이 되기 위한 삶이 행복한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 제목 4등은 생존을 위한 숫자다.

"1등 못하면 대학 못간다"는 아이를 향한 엄마의 외침이나 "나중에 나한테 고마워 할 것"이라며 아이를 향한 체벌을 정당화하는 코치의 말 속에는 '1등=생존'이라는 공식이 숨어 있다.

 

이는 곧 약육강식의, 강한 자만이 살아 남는 정글의 법칙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아이의 현재 행복보다는 미래의 더 나은 삶에 집착할 수 밖에 없다.

 

이는 곧 영화 속 준호의 이야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엄연한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그래서 늦은 밤까지 아이들은 학원을 다니고 많은 엄마들이 그런 아이들을 독려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됐다.

 

그렇기에 영화 속에서 극성을 부리는 엄마나 매질하는 코치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턱대고 비난할 수 없는 것은 현실의 무게와 고통이 고스란히 배어 있기 때문이다.

"무조건 오냐 오냐 하는게 애를 위하는 건 줄 알지"라고 되묻는 광수의 질문이 그래서 더욱 아프다.

 

정 감독은 이를 수영이라는 스포츠에 빗대 단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스포츠는 성적에 따라 삶이 극명하게 갈리는 만큼 엄마의 집착과 코치의 행태, 아이의 고통이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그만큼 영화는 한마디로 콕 짚어내기 힘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지나친 교육열의 문제점과 병폐를 수영을 통해 잘 풀어 냈다.

여기에는 정 감독의 짜임새 있는 연출과 더불어 배우들의 연기가 한 몫 했다.

 

무엇보다 박해준은 맛깔스럽게 사투리를 써가며 혹독하고 거친 수영 코치의 모습을 잘 보여줬다.

'미생'에서 전형적인 샐러리맨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 유약한 과장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다.

 

더불어 촬영도 빼놓을 수 없다.

때로는 물 밑에서, 때로는 위에서 수영장의 푸른 물살을 가르는 수영선수들을 잡아낸 영상은 긴박하면서도 평화롭고 안온한 상반된 복합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물을 투과하며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빛을 물 속에서도 잘 살린 점이 인상적이다.

보고나면 가슴이 답답하면서도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교육이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드는 작품이다.

 

'해피엔드' '은교'와 더불어 정 감독의 필모그래피에 자랑스럽게 추가할 만한 작품이 또 하나 늘어났다.

그런데 DVD 타이틀은 영 아니올시다이다.

 

2만원이 훌쩍 넘는 가격에도 불구하고 음성해설은 커녕 제작과정도 없고 달랑 예고편만 하나 부록으로 들어 있다.

넣어줄 부록이 없다면 차라리 가격이라도 내리는게 예의일텐데, 무슨 배짱으로 블루레이 타이틀과 비슷한 가격을 받는 지 은근 화가 난다.

 

1.85 대 1 애너모픽 와이드스크린을 지원하는 DVD 타이틀은 화질이 평범하다.

물 색깔 등이 좀 더 투명하게 살아나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들지만 DVD 매체의 한계상 블루레이 같은 색감과 디테일을 기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음향은 돌비디지털 5.1 채널을 지원한다.

<DVD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영화 시작하자마자 아는 얼굴이 나와서 깜짝 놀랐다. 박세리 선수가 LPGA 대회에서 우승한 내용을 전하는 뉴스 화면에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여럿 보였다. 이들은 당시 모 대기업에 근무했으나 지금은 다른 대기업으로 옮겼다.

수영 대회하면 무조건 위에서 찍는 화면에 익숙한데 이 작품은 앵글을 다양화해서 수영의 역동성을 잘 살렸다. 촬영은 '불한당 나쁜놈들의 세상'도 찍은 조형래 촬영 감독이 맡았다.

어린 수영선수들의 성적 뒤에는 엄마들의 열성이 묻어 있다. 영화가 주목하는 점도 이 대목이다.

수중 촬영은 전문팀이 해경의 도움을 받아 깊이 3~7미터에 이르는 여수의 해양경비안전교육원에서 촬영.

당초 시나리오는 중학생 수영선수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오디션과정에서 수영을 하는 중학생들이 워낙 덩치가 커서 캐스팅에 애를 먹었다. 그러다가 감독이 수영대회 촬영 장면에 참가한 유재상을 발견해 주인공으로 캐스팅했다.

당초 유재상은 동생 역할로 오디션을 봤다. 정 감독은 유재상에게 맞춰 주인공의 나이를 초등학교 5학년생으로 바꿨다.

극성 엄마 역할은 '변호인'에서 변호사의 아내 역할을 한 이항나가 연기.

폭력은 때린 자와 맞은 자 모두에게 학습된다. 때리는 것 못지 않게 맞는 것 또한 익숙해지면 타인의 고통에 둔감하게 된다.

정 감독은 "국내 스포츠에서 폭력이 근원이 국가 주도의 엘리트 스포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엘리트 스포츠를 통해 선수를 찍어 누르는 과정에서 필수 불가결한 것이 폭력"이라고 봤다.

수영 선수들의 동작을 생생하게 찍기 위해 각 배우들에게 고프로나 캐논 5D 등의 장비를 장착하고 촬영했다.

꽃이 있는 식탁
고은경 저
크로아티아 랩소디
최연진 저
4등 (1Disc)
예스24 | 애드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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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울프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