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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다르크의 수난(블루레이)

울프팩 2018. 6. 10. 17:19

세계 영화사에 길이 남는 걸작인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 감독의 '잔 다르크의 수난'(La passion de Jeanne d'Arc, 1928년)은 참으로 기이하면서도 고통스러운 영화다.

흑백 무성영화로 촬영된 이 작품은 시종일관 배우들의 얼굴 표정에 천착한다.


배우들의 특별한 액션, 또는 와이드스크린으로 펼쳐지는 풍경이나 전경 샷이 등장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집요할 정도로 배우의 얼굴을 쫓아다니며 그들의 얼굴에 서린 분노, 슬픔, 절망과 희망, 용기, 공포를 담아낸다.


내용은 프랑스 하원 도서관에 보관된 잔 다르크의 재판기록을 토대로 재현한 잔 다르크의 최후다.

영국과 프랑스 간에 벌어진 백년전쟁 중 남장을 한채 프랑스군을 이끌어 점령군이었던 영국군을 물리친 잔다르크는 1431년 영국군에게 포로가 됐다.


신의 계시를 받고 군대를 이끌었다고 주장한 그는 프랑스의 루앙으로 후송돼 영국에 충성하는 프랑스의 가톨릭 성직자들에게 종교 재판을 받는다.

고문을 포함해 무려 29차례의 심문을 받은 19세의 이 소녀는 신을 부정하며 이단이라고 고백하면 살 수 있었겠지만 그는 끝끝내 신심을 버리지 않는다.


결국 그는 1431년 화형대에서 한 줌의 재로 스러진다.

드레이어는 이 모든 과정을 한 번의 재판을 통해 압축적으로 재현했다.


무성영화지만 장면과 장면 사이에 들어가는 자막 화면이 유성영화 못지않게 많다.

이유는 원래 드레이어 감독은 이 작품을 유성영화로 기획했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 영화계가 갖고 있던 기술력의 한계로 무성영화로 촬영할 수밖에 없어서 대신 자막 화면을 사용했다.

감독이 이 작품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것은 잔 다르크가 재판 과정에서 느꼈을 인간 본연의 감정이다.


지금은 성녀로 추앙받지만 당시 19세에 불과했던 한 소녀가 강압적이고 위압적인 법정에서 느낀 공포와 절망, 슬픔을 카메라에 담고자 했다.

그래서 배우들의 얼굴에 바짝 카메라를 들이댄 채 그들의 표정으로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


막상 이 영화를 보노라면 사람의 표정이 어떠한 몸짓이나 액션, 말보다도 더 많은 감정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한마디로 이 작품은 위대한 표정 연기의 승리다.


물론 드레이어 감독의 이런 의도를 제대로 전달한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를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잔 다르크를 연기한 르네 마리아 팔코네티의 표정 연기는 압권이다.


이를 위해 감독은 팔코네티에게 분장을 하지 않은 채 돌바닥에 몇 시간씩 꿇어앉아 고통스러운 연기를 하도록 시켰다.

잔 다르크가 법정에서 느꼈을 만한 감정이 배우의 얼굴에서 그대로 우러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마치 밭고랑처럼 갈라진 주름이 굵게 간 성직자들의 얼굴과 그 위로 드리운 음영, 그에 비해 굵은 눈물을 소리 없이 흘리는 잔 다르크의 얼굴이 대조가 되면서 영화는 말할 수 없이 드라마틱한 정경을 만들어 낸다.

카메라 또한 성직자들과 군인들의 모습은 앙각으로 올려다보며 그들의 고압적인 태도와 위력을 강조했고 상대적으로 잔 다르크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찍어 희생양이 된 가련한 모습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스토리텔링이 분명하고 액션이 요란한 요즘 영화와 비교하면 지나칠 정도로 정적이며 기괴해 보일 수 있는 작품이지만 배우의 표정 연기와 카메라 워크, 편집만으로 진검 승부를 펼친 영화의 진정한 위력을 보여준 명작이다.

안타깝게도 이 작품은 국내에 블루레이 타이틀이 출시되지 않았다.


미국의 크라이테리온에서 블루레이 타이틀을 내놓았으나 한글자막이 없다.

이 블루레이 타이틀은 1080p 풀 HD의 1.33 대 1 화면비를 지원한다.


크라이테리온은 1981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발견된 네거티브 카피본을 토대로 제작했다.

이 판본은 전 세계에 온전하게 남아있는 유일한 판본으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가 복원했으며, 다시 크라이테리온에서 블루레이 제작을 위해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거쳤다.


화질은 90년 전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복원이 잘돼서 괜찮은 편이다.

흔한 필름 손상 흔적이나 잡티 하나 없이 말끔하며 드레이어 감독이 의도한 콘트라스트가 확실하게 살아 있다.


음향은 DTS HD MA 모노를 지원한다.

무성영화인데도 음향 소스가 들어간 이유는 세 가지 판본을 모두 수록했기 때문이다.


첫 째는 음향이 없는 무성영화판, 두 번째는 리처드 아인혼이 영화를 위해 훗날 따로 작곡한 'Voices of Light'를 덧입힌 판본, 세 번째는 피아니스트 겸 자곡가 미에 야나시타가 마찬가지로 따로 만든 곡을 입힌 판본 등이다.

리처드 아인혼의 음악은 마치 그레고리안 성가를 연상케 할 정도로 서정적이면서도 웅장하고 비극적이다.


따라서 골드프랩과 포티셰드가 연주한 그의 음악을 들으며 영화를 보면 영상이 더 극적으로 다가와 감정을 고양시킨다.

부록으로 캐스터 티비에르그의 음성해설, 아인혼의 인터뷰, 음악가들의 대화, 20 프레임과 24 프레임 비교, 르네 팔코네티의 딸 헬렌느 팔코네티 인터뷰, 작품의 역사 등 풍성한 내용이 들어 있다.


일부는 HD 영상으로 수록됐다.

참고로 이 타이틀은 20 프레임과 24 프레임을 선택해서 볼 수 있다.


무성영화 시대에 극장들은 같은 영화라도 서로 다른 릴을 사용해 20 프레임이나 24 프레임 등 속도를 다르게 상영했다.

따라서 같은 내용이라도 프레임 속도에 따라 상영 시간이 달라져 20 프레임은 1시간 30분, 24 프레임은 87분이 걸린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잔 다르크를 연기한 르네 마리아 팔코네티. 원래 그는 파리의 길거리 연극무대에서 코미디를 하던 배우였다. 그의 연기를 우연히 본 드레이어 감독이 마음에 들어 주연으로 발탁했다.

크라이테리온은 고몽 영화사가 보관하고 있던 네거티브 필름 소스를 이용해 2K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거쳐 블루레이 타이틀을 만들었다. 재판장이었던 피에르 코숑 주교를 연기한 유진 실베인.

1994년에 리처드 아인혼은 원래 무성영화였던 이 작품에 어울리는 음악 'Voices of Light'를 작곡했다. 장엄한 분위기의 이 곡은 영화에 비장한 느낌을 더한다.

독일 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아 상징적인 이미지들이 등장한다. 기울어진 창문의 그림자, 삐죽하게 사선으로 내리긋는 문틀과 십자가 등은 고딕 양식의 성당을 보는 것처럼 기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원래 영화사는 주연으로 미국 여배우 릴리언 기시를 원했다. 그러나 대중들이 프랑스의 성녀 역할을 미국 배우가 맡는 것에 반발하자 드레이어 감독은 프랑스 여배우 마들렌 르노와 마리 벨을 검토했다.

그러나 마들렌 르노와 마리 벨은 삭발 장면 때문에 출연을 거절했다. 그 바람에 당시 35세였던 르네 마리아 팔코네티가 주연을 맡게 됐다. 그는 감독의 요구에 따라 분장을 하지 않은 채 출연했다.

드레이어 감독은 덴마크 영화 '집안의 주인'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파리의 금융회사 소시에테 제네럴로부터 프랑스에서 촬영하는 조건으로 다음 작품 의뢰를 받았다.

이 작품의 원작은 1925년 조제프 델타이가 쓴 소설 '잔 다르크'였다. 델타이는 드레이어 감독과 함께 대본 작업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감독은 소설과 달리 심리묘사에 중점을 둔 작품을 만들었다.

드레이어는 1927년 5월부터 11월까지 프랑스 북부의 오드센 지역에서 촬영했다. 첫 개봉은 1928년 4월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했다. 그러나 지루하다는 평을 받았다.

사람들이 지나는 모습을 거꾸로 촬영하는 등 실험적인 영상이 돋보인다. 감독은 세트 전체를 한덩어리로 만들어 촬영했다. 대신 카메라가 움직일 수 있도록 이동 가능한 벽을 설치했다.

1928년 12월 독일 베를린의 우파 스튜디오에 불이나 원본 네거티브 필름이 소실됐다. 이에 드레이어 감독이 두 번째 네거티브 필름을 이용해 복원했으나 이 또한 다음 해 발생한 화재로 타버렸다.

졸지에 세상에서 볼 수 없게 된 작품이 돼버렸으나 1952년 이탈리아 영화학자 로 듀카가 복사본을 어렵게 구해 베니스영화제에서 공개했다. 그러나 이 판본은 일부 내용이 손실된 상태였다.

온전한 판본은 1981년 감독에게서 빌렸다가 되돌려주지 않은 원본 네거티브의 첫 번째 카피본이 노르웨이 오슬로의 정신병원에서 발견되면서 다시 빛을 보게 됐다.

촬영은 루돌프 마테가 맡았다. 그는 훗날 미국으로 건너가 촬영뿐 아니라 연출도 했다.

르네 마리아 팔코네티는 이 작품에 출연하면서 겪은 고통스러운 기억 때문인지 다시는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다. 그는 1946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죽었다.

잔다르크의 수난
크로아티아 랩소디
최연진 저
Criterion Collection: Passion Of Joan Of Arc (잔 다르크의 수난)(한글무자막)(Blu-ray)
Renee Falconetti
예스24 | 애드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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