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볼 만한 DVD / 블루레이

기쁜 우리 젊은 날

울프팩 2012. 2. 24. 22:05

1987년은 격변의 해였다.
연초부터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더라"는 궤변으로 시작된 서울대생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이 불거지더니, 급기야 6.10 민주항쟁으로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여세를 몰아 찌는 듯이 덥던 여름, 우리 민주화운동의 기념비적 사건인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즉 전대협이 결성돼 학생운동의 중심이 됐다.
그 혼란의 와중에 조용한 멜로드라마 한 편이 개봉해 세상사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줬다.

바로 배창호 감독의 '기쁜 우리 젊은 날'(1987년)이었다.
순수하다못해 쑥맥같은 청년이 한 여인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지고지순한 사랑이야기인데, 신파로 빠지지 않고 가벼운 코미디 풍으로 처리해 높은 흥행 성적을 거뒀다.

당시 뜨거운 청춘이었던 만큼, 극장에서 영화를 보면서 순수한 사랑에 가슴이 아렸던 기억이 난다.
지금 다시 이 작품을 보면 그때와 달리, 추억의 편린으로 흘러가버린 보석같은 젊은 날에 대한 추억으로 가슴이 아련하다.

배 감독은 풋풋하고 순진했던 1980년대 연애담을 꽤나 설득력있게 잘 묘사했다.
특히 안성기가 연기한 어수룩한 청년의 우스꽝스런 상황이 역설적이게도 가슴이 아프다.

그만큼 안성기와 이 작품으로 영화에 첫 출연한 황신혜 등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다.
25년이 지나 다시 보니 이제는 그때와 다른 장면에서 가슴이 뭉클하다.

아내가 위독하다는 소리를 듣고 망연자실한 아들의 어깨를 말 없이 다독이던 아버지의 등이다.
젊은 날에는 보이지 않던 그 부분이 이제는 어떤 심정인 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나이를 먹은 탓인가, 청춘의 한때를 돌아보게 하고 그때는 몰랐던 부분을 느끼게 해준다.
그래서 이 영화가 좋다.

1.85 대 1 애너모픽 와이드 스크린을 지원하는 DVD 타이틀은 화질이 그저 그렇다.
필름 손상 흔적이 많이 보이고 샤프니스도 떨어지며 색도 바랬다.

음향은 돌비디지털 2.0 채널을 지원하며, 부록으로 배 감독의 음성해설이 들어 있다.

<DVD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이 작품은 배창호 감독이 당시 조감독이었던 이명세와 공동으로 대본을 썼다. 타이틀을 사진작가 구본철이 만들었다.
당시 흥행감독이었던 배창호는 이 작품에서 1인칭 화자 시점으로 앵글을 시도했다. 극중 인물들이 카메라를 향해 말을 걸면서, 관객들은 마치 영화 속 인물이 된 듯한 느낌을 받는다.
1980년대에는 생맥주 잔에 막걸리를 따라 마셨다. 지금은 보기 힘든 풍경이다.
황신혜는 이 작품이 첫 번째 출연 영화다. 안성기의 어수룩한 청년 연기도 좋았다.
극중 최불암이 연기한 아버지와 안성기가 맡은 아들의 이야기는 배 감독이 부친과 얽힌 부자관계를 많이 투영했다. 당시 80년대에도 지금만큼은 아니지만 취직난이 심해 "요즘 대학을 나오고도 취직하기 힘들다더라"라는 대사가 나온다.
극중 아버지가 "종합상사를 들어가라"는 말을 할 만큼 80년대 당시에는 수출의 최전선에 있던 대기업 종합상사들이 꽤 인기있는 직장이었다. 배 감독도 영화감독이 되기 전에 종합상사를 다녔다.
사랑하는 여인이 청혼을 받는 장면을 보고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은데다, 갑자기 추운 곳에서 따뜻한 곳에 들어오는 바람에 안경에 김이 서려 앞을 보지 못하는 주인공이 벌이는 소동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가슴이 아프다. 이 장면을 무음처리한 배 감독의 감각이 돋보인다.
극중 안성기는 연극 대본을 써서 황신혜에게 보여주는데, 제목이 '나의 사랑 나의 신부'다. 이 작품은 나중에 이명세가 감독을 맡았다.
지금은 보기 힘든 자전거 배달부와 주홍색 공중전화 박스 등이 추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공중전화 박스는 제작진이 일부러 만들었다.
배 감독은 토셀리의 세레나데를 메인 테마로 사용했다. 제목은 이 곡의 번안 가사 중 '옛날을 말하는가. 기쁜 우리 젊은 날'이란 대목에서 따왔다. 인물만큼 배경의 명도를 높여 밝게 찍은 하이키 조명 장면.
느낌이 참 따뜻한 장면이다. 촬영은 고인이 된 유영길 촬영감독이 맡았다.
결혼식 하객 중에 졸다가 깜짝 놀라 깨는 사람이 배창호 감독, 바로 옆이 이명세 조감독이다.
제주 중문해수욕장에서 촬영. 당시에는 해외를 쉽게 나갈 수가 없어서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많이 갔다.
이 장면에서 찹쌀덕과 메밀묵을 외치는 들짐 장사꾼 목소리는 배 감독이 연기했다. 별표전축과 독수리전축을 거쳐 태광, 인켈로 이어지던 전축들이 뒤로 보인다. 당시까지만 해도 CD보다 LP를 많이 들었다.
아내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넋을 잃은 아들의 어깨를 말없이 두드리고 돌아서는 아버지의 등이 여러가지를 이야기한다. 이 장면에서 가슴이 뭉클했다.
배 감독은 임신중독증인데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고 싶어 목숨과 바꿔 아이를 낳은 친지의 이야기를 영화에 그대로 옮겼다. 그 친지도 출산 후 뇌출혈로 사망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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