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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만한 DVD / 블루레이

남부군(블루레이)

울프팩 2021. 10. 10. 23:28

지리산에서 활동한 빨치산을 다룬 소설 중에 대중적으로 인기를 끈 대표적인 세 작품이 조정래의 '태백산맥', 이병주의 '지리산', 이태의 '남부군'이다.

이 가운데 태백산맥과 지리산은 각 10권이 넘는 대하소설이어서 영화로 만들기 힘든데, 두레출판사에서 나왔던 남부군은 상, 하 두 권으로 돼 있어서 상대적으로 영화화가 용이하다.

 

빨치산 출신이 쓴 빨치산 문학의 효시

남부군이 태백산맥이나 지리산과 다른 점이 있다면 작가의 체험이라는 것이다.

책 표지에도 '어느 빨치산의 수기'라는 부제를 달아 이를 강조했다.

 

본명이 이우태인 작가 이태는 일제 강점기 시절 일본에게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해방 후 돌아와 기자가 됐다.

서울신문을 거쳐 합동통신에서 기자로 일하던 중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그는 삶의 굴곡을 겪는다.

 

북한이 서울을 점령한 뒤 평양의 조선중앙통신사가 그를 종군기자로 채용한 것이다.

원래 그는 해방 후 좌, 우익이 첨예하게 대립했던 혼탁한 상황 속에서 좌익에 기울었기에 북한 측 종군기자 활동에 큰 거부감이 없었던 모양이다.

 

북한군을 따라 전주까지 내려갔던 그는 거기서 철수 길이 막혀 입산하면서 조선노동당 전북도당 유격 사령부 대원, 즉 빨치산이 됐다.

그렇게 그는 지리산까지 이동해 나중에 전설적인 이현상이 이끄는 남부군 소속이 됐고 1952년 3월 체포될 때까지 17개월 동안 빨치산으로 활동했다.

 

체포된 뒤 그는 전향을 해서 풀려났고 훗날 박정희 정권 시절에 국회의원까지 했다.

1975년에 그는 교통사고로 입원을 해서 잠시 쉰 적이 있는데 그때 쓴 글이 바로 실록 소설 '남부군'이다.

 

하지만 빨치산의 수기를 내려는 출판사는 한 군데도 없었다.

그렇게 출판사를 떠돌던 그의 원고는 작가 이병주와 조정래의 손에도 들어갔다.

 

두 사람의 소설 '지리산'과 '태백산맥'에 나오는 빨치산에 대한 생생한 묘사는 바로 이태의 '남부군'에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그나마 조정래는 이태의 작품을 참고해 빨치산 묘사에만 활용했지만 이병주는 월간 '세대'에 15년 동안 '지리산'을 연재하면서 '남부군' 원고에서 여러 부분을 차용해 훗날 표절 시비까지 일었다.

 

이태의 소설 '남부군'이 세상에 나온 것은 1988년이다.

이 책은 나오자마자 화제를 일으키며 베스트셀러가 됐다.

 

무엇보다 작가의 체험이라는 사실의 무게감이 절대적이었다.

이 작품이 인기를 끌면서 비슷한 류의 빨치산 작품들이 쏟아져 나온 만큼 사실상 빨치산 문학의 효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태는 이 소설 덕분에 오랜 세월 소식도 모른 채 살았던 빨치산 동지인 시인 김웅을 다시 만났다.

'남부군'에서 김영이라는 가명으로 등장한 김웅은 전향을 하지 않아 14년 옥살이를 하고 나와 힘들게 살다가 이태를 만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이태는 소설을 출판하기 전에 고 김영삼 대통령의 대표적 정치모임이었던 민주산악회에서 활동하며 산악대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든 정지영 감독도 민주산악회원이던 후배를 통해 이태를 만나 영화 작업을 하게 됐다.

 

이태의 소설 '남부군'은 기자 출신답게 군더더기 없는 간결한 문체로 사실을 세세하게 묘사한 점이 특징이다.

특히 빨치산들의 산중 생활 묘사는 눈에 보이는 것처럼 생생하다.

 

원작의 디테일을 잘 살린 영화

정 감독의 영화 '남부군'(1990년)은 원작의 특징을 잘 살렸다.

무엇보다 소설에 나오는 빨치산들의 생활을 실감 나게 재현해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다.

 

컴퓨터 그래픽이 없던 시절이어서 배우들은 빨치산의 고행을 몸으로 직접 때웠다.

한 겨울에 얼음물에 몸을 담그고 강풍이 몰아치는 설산을 맨 발로 헤매며 산비탈을 구르는 장면을 보면 배우들의 고생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전투 장면도 외국 전쟁영화처럼 박력 넘친다.

다만 물량 공세로 밀어붙이는 할리우드 영화에 비하면 자본의 열세에서 오는 한계가 보인다.

 

치열한 전투 후 계곡이나 눈 밭에 널브러진 시체들이 얼마 안돼 스펙터클한 장관을 연출하지 못했다.

특히 막판 주인공(안성기)이 절규하는 장면은 전체적인 이야기 규모에 비해 초라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그럼에도 원작을 충실하게 재현해 소설이 갖고 있는 이상의 재미를 선사한 작품이다.

특히 지금은 고인이 된 최진실을 비롯해 최민수, 임창정, 이혜영, 독고영재, 전미숙, 이진우 등 쟁쟁한 스타들의 풋풋한 시절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역으로 등장한 임창정은 이 작품에서 이미 배우로서 성공 가능성을 보여줬다.

심지어 최민수, 최진실의 매니저였다가 나중에 살해당한 배병수도 단역으로 출연했다.

 

여기에 작고한 유영길 촬영감독이 찍은 영상은 수려하면서도 웅장한 산세의 풍광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작품 속 무대는 지리산이지만 촬영은 오대산, 월출산, 선운산, 대관령 등 곳곳을 돌며 찍어서 그림이 아름답다.

 

신병하의 OST 수록한 블루레이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신병하의 음악이다.

2005년 세상을 떠난 작곡가 신병하는 '장군의 아들' 시리즈와 '하얀 전쟁' 등 수십 편의 영화와 드라마 음악을 담당했다.

 

미군 기지에서 출발한 밴드들이 그렇듯 팝, 재즈, 록이 골고루 섞인 음악을 했던 신병하는 사이키델릭 음악 같은 몽환적인 사운드가 특징이다.

대표적으로 신병하의 노래를 많이 부른 가수 이미배의 노래에서 이런 특징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가 작곡한 '당신은 안개였나요'처럼 이미배의 노래는 블루지한 재즈 느낌이 강하다.

'남부군'의 영화음악도 신시사이저가 섞인 몽환적이면서 서정적이며 애틋한 멜로디가 특징이다.

 

정 감독과 배우들도 영화음악을 높이 평가할 만큼 신병하가 담당한 이 영화의 음악은 극의 분위기를 잘 살렸다.

이번에 출시된 블루레이 타이틀에 신병하의 음악을 담은 OST가 따로 들어 있어 더 할 수 없이 반갑다.

 

블루레이는 영화 본편과 OST CD 등 2장의 디스크로 구성됐다.

1080p 풀 HD의 16 대 9 화면비를 지원하는 블루레이 타이틀은 제작 연도를 감안하면 화질이 좋다.

 

영상은 2020년에 정 감독 감수 아래 35미리 원본 네거티브 필름을 토대로 4K로 디지털 리마스터링 했다.

덕분에 색감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등 놀랍도록 깨끗하게 복원됐다.

 

초반에는 필름 손상 흔적도 보이고 지글거림이 심하지만 뒤로 갈수록 안정된다.

다만 암부 디테일은 산 중에 조명을 많이 세우기 힘든 등 촬영 여건의 한계 때문에 많이 묻힌다.

 

DTS HD MA 5.1 채널을 지원하는 음향은 간헐적 서라운드 효과를 들려준다.

주로 사운드가 전방에 집중된 편이며 전투 장면에서 포 소리 등이 리어 채널에서 들린다.

 

부록으로 정 감독과 안성기, 주성철 평론가의 해설, 디지털 복원 전후 비교 영상, 앙코르 로드쇼 기념 예고편 등이 들어 있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이 작품의 각본은 원작자인 소설가 이태와 서울대 운동권 출신의 장선우 감독이 썼다. 무전기 앞에 등을 보이고 앉아있는 배우는 이진우다.
아스라한 안개 속에서 무리들이 걸어오는 영상이 인상적이다. '결혼이야기' '청풍명월' '북경반점' 등을 연출한 김의석 감독이 조감독이었다.
시인 출신 빨치산 김영을 연기한 최민수. 실제 빨치산이었던 김웅이 모델이다. 이 작품은 상영 시간이 2시간 39분으로 꽤 긴 편이다.
당시 무명에 가까운 신인이었던 최진실. 2008년 일본 출장 중에 그의 자살 소식을 듣고 너무 놀랐던 기억이 있다. 당시 일본 신문과 방송에서도 그의 죽음을 다뤘다.
당시 신인이었던 신윤정이 극 중 최민수의 애인으로 등장. 이 작품 촬영을 위해 남프로덕션이라는 제작사가 생겼다.
정 감독은 안성기와 균형을 맞추기 위해 여주인공에 당시 스타였던 이미숙, 원미경을 섭외하려고 접촉했으나 임신과 일정 등의 문제로 맞지 않아 신인 오디션을 통해 최진실을 선발했다.
임창정이 어린 소년 빨치산으로 출연. 당초 김일성 사진을 사용하려 했으나 당시 공연윤리위원회 반대로 넣지 못했다.
원작자인 이태는 산에서 만난 박민자(최진실)에게 영화처럼 바이런 시를 적어줬다. 이 작품은 14억 원을 들여 만들었다.
당시 이 작품은 빨치산을 인간적으로 미화했다며 극우보수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원작 소설은 빨치산들의 생활상 등 인간적인 면모에 치우치는 바람에 정치적 배경 등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이 작품은 1989년 촬영 중 정 감독이 외화직배에 반대하며 서울극장에 뱀을 푼 사건으로 구속돼 52일간 갇혀 있는 바람에 중단됐다. 그가 다시 풀려 나온 뒤 촬영을 재개했다.
밭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 국군과 빨치산들이 '눈물젖은 두만강'을 함께 부르는 장면은 훗날 장훈 감독의 '고지전'에서 남,북한군이 '전선야곡'을 합창하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노래를 부르는 이유는 두 작품이 다르지만 민족의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트위스트 김이 빨치산으로 등장. 1960년대 '맨발의 청춘'에서 신성일과 함께 나와 까불거리던 모습과 전혀 다른 진중한 연기를 선보였다.
이만희 감독의 딸 이혜영이 여성 빨치산으로 등장. 원작자 이태는 촬영현장을 따라다니며 고증을 했다.
실감나는 전투 장면을 위해 대량의 화약을 터뜨리고 공포탄을 장전한 실제 M1 소총 20정을 동원해 촬영했다.
정 감독은 원작자 이태와 함께 서울 신림동에서 과일 노점상을 하던 김웅(극 중 김영)을 찾아갔다. 김웅은 오랜 옥살이로 폐소공포증이 생겨 극장에 혼자 가지 못할 정도여서 이태가 데려갔다.
원작자 이태는 포로수용소에 갇혀있던 중 군 고위직에 있던 학교 선배들의 도움으로 그냥 풀려났다. 반면 김웅은 전향을 하지 않고 버텨 14년 동안 수감됐다. 그래서 이태는 살아있는 동안 김웅에게 항상 미안한 감정을 갖고 있었다.
남부군 시절 이태를 비롯한 많은 빨치산들이 재귀열을 앓아 사경을 헤맸다. 극 중에서는 이름 모를 열병으로 나온다.
안성기는 실제 한겨울 산 속에서 엄청난 두께의 얼음이 언 계곡물에 들어가 촬영했다. 핫팩도 없던 시절이어서 몸으로 버텼다.
원작자 이태는 1997년 사망했다. 최진실, 배병수, 강태기, 전미숙, 트위스트 김 등 이 작품 속 많은 출연자들이 고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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