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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정(블루레이)

울프팩 2023. 1. 16. 00:33

일제 강점기 시절인 1923년 발생한 황옥 경부 사건은 지금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다.

당시 경성을 떠들썩하게 만든 김상옥 의사 의거 직후 무장독립운동단체 의열단은 조선총독부 등 일제 시설을 폭파하는 거사를 준비한다.

 

의열단은 권총 5자루, 총알 155발, 단재 신채호 선생이 작성한 '조선혁명선언문' 900여 장과 함께 중국 상하이에서 구한 폭탄 36개를 안둥과 신의주를 거쳐 경성으로 향하는 기차에 몰래 숨겨 갖고 들어오다가 사전에 정보가 누설돼 경성역에서 일본 경찰에게 모두 체포된다.

이때 의열단 행동대장 김시현과 함께 체포된 인물 가운데 놀랍게도 조선인으로 일본 경찰의 간부가 된 황옥 경부가 있다.

 

황옥 경부 미스터리

재판에서 황옥 경부는 "승진을 위해 의열단을 일망타진하려고 위장 협조했다"고 읍소했으나 징역 10년형을 받았다.

당시 동아일보 등 언론 보도를 보면 일본 사법부가 황옥의 의열단 위장침투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조선 민중들은 황옥을 의열단원으로 보고 그와 가족을 돕기 위한 성금을 보내기도 했다.

 

황옥은 해방 후 폭탄 사건의 주범이었던 김시현 등 의열단원들과 교류하며 반민특위에 나가 친일파 고발을 위해 증언하고 미 군정청 경무부에서 경무총감으로 일했다.

그러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북한에 끌려간 뒤 소식이 끊겼다.

 

학계에서는 아직까지 황옥의 정체에 대해 명확하게 입증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의열단을 만든 약산 김원봉은 황옥을 의열단원이라고 했으나 문서 등 명확한 증거자료 없이 입으로 전한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나 일제의 밀정이라면 징역 10년이라는 중형을 받을 리 없다.

특히 황옥을 도와 의열단을 체포한 조선인 출신의 일본 경찰 김덕기는 상을 받은 반면 황옥만 감옥에 갇혔다.

 

하지만 황옥은 6년 정도 복역하고 1929년 가출옥했다.

따라서 의심을 살만한데도 친일파를 단죄하는 반민특위에서 함께 옥고를 치른 의열단원을 비롯해 누구도 황옥을 친일파로 고발하거나 증언하지 않았다.

 

그 바람에 황옥 경부 사건은 지금까지 의견이 분분한 채 베일에 쌓여 있다.

참으로 흥미롭고 궁금한 사건이다.

 

1980년대로 소환된 황옥

그렇게 역사 속 미스터리한 인물로 남은 황옥 경부는 1983년 11월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다시 소환됐다.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 서울대에서 민주화 시위를 하던 학생이 강경 진압 분위기 속에 중앙 도서관 건물에 매달렸다가 떨어져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망한 학생은 경남고를 수석 졸업하고 서울대 치대에 합격했으나 색약으로 입학이 취소된 뒤 재수해 서울대 공대에 입학한 황정하다.

그가 바로 황옥 경부의 손자다.

 

그는 국제경제학회라는 동아리에서 사회과학을 공부하며 시국 토론을 하고 야학 교사로도 활동했다.

건물에서 떨어진 뒤 그는 서울대 의대에 다니던 형이 있던 서울 혜화동 서울대병원으로 이송됐으나 며칠 뒤 숨을 거뒀다.

 

훗날 그가 떨어진 서울대 중앙도서관 입구에 추모비가 건립됐다.

그의 추모비는 서울대 안에 세운 민주열사의 첫 번째 추모비다.

 

21세기가 소환한 황옥

세월이 흘러 손자가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세상을 떠난 지 30여 년이 흐른 2016년, 김지운 감독이 다시 황옥 경부를 영화로 소환한 작품이 '밀정'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가명으로 나오지만 실존인물이 누구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주인공인 일경 간부 이정출(송강호)은 황옥 경부, 의열단 행동대장 김우진(공유)은 김시현, 의열단장 정채산(이병헌)은 약산 김원봉, 여성 의열단원 연계순(한지민)은 현계옥이 모델이다.

실제 인물들을 토대로 재구성한 영화는 무엇보다 긴장감이 일품이다.

 

황옥 경부는 일본 경찰에 몸담고 의열단을 뒤쫓으면서 몰래 의열단을 돕는 이중간첩이다.

그를 바라보는 입장에 따라 조직을 배반한 밀정일 수 있고, 조직을 살린 간첩일 수도 있다.

 

김 감독은 이중간첩으로 아슬아슬한 삶을 살아가는 이정출의 모습을 마치 추리소설처럼 긴장감 넘치게 묘사했다.

특히 의열단과 일본 경찰이 쫓고 쫓기는 기차 장면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상 폐쇄 공간이나 다름없는 달리는 기차 안에서 벌어지는 추격전은 잔뜩 긴장을 고조시켰다가 폭발적인 액션으로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더불어 매 순간 흔들릴 수밖에 없는 이정출의 불안한 심리를 와이드 앵글과 클로즈업을 적절히 섞어 묘사한 영상도 뛰어나다.

 

영상이 살 수 있었던 것은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가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클로즈업으로 잡은 영상에서 미세하게 떨리는 표정으로 복잡 미묘한 감정 상태를 전달한 송강호와 몇 장면 나오지 않지만 묵직한 존재감을 발휘한 이병헌, 그림 속에 잘 어우러져 완벽한 호흡을 보여준 공유와 한지민 등 모두 연기가 뛰어났다.

 

그중에서도 악독한 일본 경찰 하시모토를 연기한 엄태구의 강렬한 연기는 단연 발군이다.

대배우들의 기싸움이 대단한 영화에서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의 연기를 선보인 그가 눈을 부릅뜨며 소름 끼치는 악당을 똑 떨어지게 연기한 덕분에 긴장감이 고조됐고 다른 배역들까지 살아났다.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콜드 누아르

김 감독은 이 작품을 '콜드 누아르'라고 불렀다.

비정한 느낌이 강조된 차가운 분위기의 스릴러라는 뜻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흰색과 푸른색 등을 강조해 차가운 느낌이 들게 만들었다.

이를 여실히 느낄 수 있는 부분이 막판 길게 늘어선 가로수 사이로 뻗은 길을 송강호가 등 돌린 채 걸어가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전체적으로 청회색이 강조돼 쓸쓸함과 비감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굳이 감독이 명명한 콜드 누아르를 거든다면,  콜드 누아르란 결국 인간에 대한 연민을 느끼게 하는 누아르다.

 

주인공 이정출은 살아남기 위해 회색지대에서 목숨을 건 줄타기를 해야 했던 인물이다.

그래서 그가 떠난 자리에 가련한 존재인 인간에 대한 진한 연민이 남아 있다.

 

그런 그에게 그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사는 요즘 우리들이 밀정이라고 욕할 수 있겠는가.

1080p 풀 HD의 2.39 대 1 화면비를 지원하는 블루레이 타이틀은 화질이 좋다.

 

윤곽선이 깔끔하고 부드러운 색상의 톤이 잘 살아 있다.

DTS HD MA 5.1 채널을 지원하는 음향은 적당한 서라운드 효과를 들려준다.

 

채널 분리가 적절하게 잘 돼 있고 총소리의 울림도 좋다.

부록으로 감독과 배우들의 음성해설, 제작 배경, 배우 소개, 액션연출 설명, 삭제장면과 시사회 풍경, 관객과 대화 등이 들어 있다.

 

부록들도 HD 영상으로 제작됐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박희순이 연기한 인물은 김상옥 열사를 모델로 했다. 일경에 쫓기던 그는 서울 효자동 어느 집 화장실에서 권총으로 자결했다.
이 작품은 조명을 적절하게 사용해 인물들의 얼굴 위로 떨어지는 그림자를 잘 살렸다. 촬영은 '헤어질 결심' '남한산성'을 찍은 김지용이 맡았다.
한지민이 연기한 연계순은 여성 의열단원이었던 현계옥이 모델이다. 기생이었던 현계옥은 의열단에 가입해 무장투쟁에 필요한 폭탄을 운반했다. 영어, 일본어, 중국어 등 외국어에 능했던 그는 1928년 구 소련으로 망명한 뒤 행적이 끊겼다.
중국 상하이의 처둔, 라오싱, 썽창 등 3개 세트장에서 극 중 릴리바가 나오는 1920년대 경성 남산통과 상하이의 프랑스 및 일본 조계 장면 등을 찍었다.
상하이 처둔 세트장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다방 '카카듀' 장면을 촬영. 탕웨이가 출연한 '색계'와 '암살'도 여기서 찍었다.
공유는 이 영화를 찍으며 촬영한 흑백 사진을 드라마 '도깨비'에 나오는 퀘벡시티의 묘비 사진으로 사용했다.
최재원 워너브라더스코리아 대표는 김지운 감독에게 "송강호가 출연하기로 했다"고 하고, 송강호에게는 "김 감독이 연출하기로 했다"고 말해 두 사람을 끌어들였다.
제작진은 3량의 기차 세트를 만들어 촬영. 기차의 움직임을 살리기 위해 유압식 대린 스핀을 연결하는 방법을 기차를 흔들었다.
일본 경찰을 연기한 엄태구 연기가 훌륭했다. 무술 감독은 정두홍이 맡았다.
서울역 촬영을 허가받지 못해 중국 상하이 세트를 경성역처럼 꾸며서 촬영.
실제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감옥 장면 등을 촬영
원래 시나리오는 이정출의 나이가 많지 않았으나 송강호 출연이 결정되면서 나이를 올렸다.
워너브라더스는 이 작품을 처음 한국 영화에 투자했다. 워너는 862만 달러의 제작비를 전액 투자했다.
조선총독부 연회장 장면에 라벨의 '볼레로'가 흐른다. 김 감독은 "볼레로가 제의적 느낌이 강한 음악"이라고 말했다.
길게 뻗은 가로수 사이를 송강호가 걸어가는 장면은 캐롤 리드 감독의 '제3의 사나이'에 대한 오마주다.
경복궁에 있다가 해체된 중앙청 건물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재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