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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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들의 행진(블루레이)

울프팩 2016. 2. 27. 11:53

1970년대, 80년대 금지곡 중에는 영화음악이 많았다.
영화 '별들의 고향'에 나왔던 윤시내의 '나는 열아홉살이에요', 이장희의 '한 잔의 추억', 송창식의 '왜 불러' '고래사냥' 등이 대표적이다.

 

워낙 암울했던 시기여서 지금 생각하면 별 것 아닌 가사에도 정부가 민감하게 반응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최고봉은 단연 영화 '바보들의 행진'에 나온 송창식의 노래들이다.

 

지금은 CD로 OST까지 나왔지만 공연윤리위원회의 사전심의가 폐지된 1996년까지 송창식의 '고래사냥'과 '왜 불러' 등은 방송에서 들을 수 없고, 음반판매도 할 수 없는 금지곡이었다.
그래서 하길종 감독의 영화 '바보들의 행진'(1975년)을 떠올리면 영상보다 노래가 먼저 생각난다.

 

영화도 거칠것 없는 가사의 노래만큼이나 파격적이다.
미국 UCLA 영화학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당시 사회를 비판적으로 봤던 하 감독은 자신의 시각을 영화 속 청춘들에게 그대로 투영했다.

 

억압적인 독재정권 아래 밤 12시 이후에는 통행금지에 걸려 돌아다니지 못하고 강제로 군대에 끌려가며, 심지어 장발 단속 때문에 머리도 마음대로 기르지 못하는 세상이 하 감독의 눈에 올바로 보일리가 없었다.
그만큼 암울했던 그 시절 청춘들은 고민과 방황이 많았다.

감독은 이 같은 시대상을 병태(윤문섭), 영철(하재영), 영자(이영옥) 등 대학생 캐릭터들을 통해 그렸다.
결국 제목이 말하는 바보들이란 극중 병태의 대사처럼 무엇하나 이루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체제에 순응할 수 밖에 없는 억눌린 청춘들을 의미한다.

하 감독의 이 같은 문제 의식은 결국 검열에 걸려 영화가 무려 30분이나 잘려나가는 심한 난도질을 당했다.
그런데도 영화는 서울에서만 15만 관객을 동원하며 당시로서는 대성공을 거뒀다.

영화가 온전했더라면 더 많은 관객이 들었을 지도 모른다.

최근 출시된 블루레이 타이틀은 이 같은 아쉬움을 달래준다.

 

영화 및 DVD 타이틀에서 잘려 나간 장면들이 대거 복원됐다.

물론 초반 일부 장면들은 대사가 사라지긴 했지만 영상은 대부분 볼 수 있다.

 

영상도 DVD 타이틀과 달리 1080p 풀HD의 2.35 대 1 오리지널 화면비로 수록됐다.

과거 DVD 타이틀은 좌,우가 뭉텅 잘려나간 4 대 3 풀스크린이어서 대사는 들리는데 배우가 아예 화면에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런 문제를 말끔하게 해소했다.

 

화질은 복원이 잘돼서 DVD 타이틀과 달리 괜찮은 편이다.

물론 원본 필름의 잡티와 손상 흔적 등은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나온다.

음향은 DTS-HD 모노를 지원한다.

부록으로 정성일 평론가의 해설과 달시 파켓의 해설, 검열로 잘려나간 장면들과 스틸, 각종 검열자료와 대본 등이 수록됐다.

 

특히 우리말 음성해설에도 한글자막이 들어 있는 점이 돋보인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포착한 장면들> 

극장 상영은 물론이고 DVD 타이틀에서도 잘려 나간 초반 장면. 일병으로 출연한 김희라가 신검 대상자들을 줄 세워 놓고 대화를 하는 장면이 영화에서 삭제됐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도 이 부분 대사가 누락됐는데, 부록으로 수록된 검열대본을 보면 내용을 알 수 있다. 

학교 장면은 대부분 경희대에서 촬영. 하길종 감독의 동생인 배우 겸 감독 하명중도 의사로 잠깐 나온다. 

그 유명한 장발단속 장면. 1970년대는 미풍양속을 이유로 경찰관이 자를 들고 다니며 무릎 위로 일정 길이 이상 올라가는 미니스커트와 장발을 단속했다. 머리가 길면 파출소로 끌려가 '바리캉'으로 머리를 밀어버리는 소위 '고속도로'를 만들었다. 이 장면에서 그 유명한 송창식의 '왜 불러'가 터져나왔고 영상과 겹쳐진 노래가 경찰관을 조롱한다는 이유로 금지됐다. 

장발 단속하는 경찰관 머리도 너무 길어서 시나리오 검열 때 삭제 지시가 떨어졌다. 버스에서 껌팔이 소년이 껌파는 장면과 출결이 모자라 체육수업때 F학점을 받지 않으려고 헌혈하는 장면, 방송국에서 대학생들 인터뷰하는 장면 등이 시나리오 단계에서 삭제됐다. 

영자 역의 이영옥과 병태 역의 윤문섭. 1955년생인 이영옥은 아역배우 출신으로 '병태와 영자'에도 출연. 출연 당시 성대생이었던 윤문섭은 이 작품 한 편만 찍고 졸업 후 대우에 입사했다. 엄청 넓은 셔츠 칼라가 눈에 띈다. 마치 액션피겨 옷 같다. 원래 여주인공은 정윤희를 검토했고 제작신고서에도 그렇게 올라갔으나 촬영 때 이영옥으로 바뀌었다. 

1941년생인 하길종 감독은 서울대 불문과를 나와 에어프랑스 근무 중 미국 UCLA에 입학해 영화를 전공했다. 졸업 당시 MGM이 미국 전체 영화학과 학생 4명에게만 주는 메이어그랜드상을 받아 주목을 받았다. UCLA 강사 자리가 보장된 상황에서 귀국해 영화를 찍었으나 38세인 1979년 뇌졸중으로 요절했다. 

데이트 장소로 나온 능동 어린이대공원. 이 장면에서 병태는 '어린이날' 노래를 휘파람으로 분다. 영화 속 대사를 보면 당시 단체 미팅 회비가 2,000원인데 짬뽕 20그릇 값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짬뽕 한 그릇이 100원이던 시절 얘기이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드라마 '모래시계'에도 담배피던 여대생이 빰 맞는 장면이 나오는데, 당시 여성의 흡연은 충격적인 일로 받아들였다. 심지어 영화 속 흡연장면 자체도 파격이었다. 그만큼 담배피는 여성은 전혜린처럼 자유와 반항을 추구하는 신여성으로 꼽혔다.

지금과 다른 이대 정문풍경. 교문을 지나자 나오는 다리 밑으로 기차가 다녔고 마을이 있었다. 오른쪽 위편에 운동장이 있는데 지금은 저 곳에 건물이 들어섰다. 영철이 자전거로 이대생을 태우고 학교에 들어가는 장면을 보면 1970년대에는 남자가 출입이 가능했던 모양이다. 1980년대 이대는 축제 때를 제외하고 정문에서 남자들의 교내 출입을 막았다. 

이 작품 촬영 후 1년 뒤 '고교 얄개'에 나와 유명해진 이승현이 신문팔이 소년으로 등장. 사람에 대한 믿음을 얘기하는 이 부분은 지금보면 낯간지럽지만 그만큼 순박했던 70년대에는 절실한 울림이었다. 

각본을 쓴 원작자인 작고한 소설가 최인호와 고인이 된 유명 코미디언 땅딸이 이기동이 술마시기대회 심사위원으로 등장. 최인호는 이 영화의 나오는 송창식의 노래 '고래사냥' 가사도 썼다. 

미첼카메라를 이용해 2.35 대 1 시네마스코프 화면비로 촬영. 촬영은 정성일 촬영감독이 맡았다. 

지금은 공원으로 바뀐 여의도 광장. 원래는 비행장이었던 곳을 박정희 정권 시절 군사쿠데타를 기념해 5.16 광장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 영화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들고찍기와 사선으로 기운 앵글을 사용한 점이 돋보인다. 촬영은 정일성 촬영감독이 맡았다. 

화천공사에서 제작한 이 영화는 1974년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 검열에서 5회나 반려됐고 촬영 후에도 28분이 잘려 나갔다. 그 바람에 감독이 재편집하면서 대본과 영화 순서가 달라지며 이야기가 뒤죽박죽됐다. 

개봉 당시 화제가 됐던 입영열차 키스씬. 이 영화에 나온 송창식의 '고래사냥' '왜 불러' 김상배의 '날이 갈수록' 등은 모두 인기곡이 됐다.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겠지만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로 시작하는 '전우여 잘자라'도 영화 삽입이 금지됐다.

 

바보들의 행진
크로아티아 랩소디
최연진 저
바보들의 행진 : 블루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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