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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DVD / 블루레이

벤허 (블루레이)

울프팩 2012. 8. 18. 09:40

국민학생이던 1970년대 중반 어머니 손을 잡고 동네 동시상영관에 영화를 보러 간 적이 있다.
자그마치 3시간이 넘는 그 영화는 무척이나 지루했던 기억이 난다.

바로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벤허'(Ben-Hur, 1959년)였다.
제작된 지 10여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한국에서는 동네를 떠돌며 상영되고 있었다.

나중에 이 영화를 무척 재미있게 보고 나서, 영화 감상도 때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국민학생은 소화하기에 무리가 있는 걸맞지 않는 영화였다.

예나 지금이나 극장을 찾는 이유는 집에 있는 TV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화면과 웅장한 음향이 주는 즐거움에 있다.
벤허가 제작된 1950년대도 마찬가지였다.

1950년대 TV가 널리 보급되면서 위기를 맞게된 미국 영화사들은 타개책으로 TV가 줄 수 없는 대화면의 위력에 집중했다.
그래서 와이드스크린에 걸맞는 대작 영화를 기획했고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벤허였다.

기획 의도 답게 벤허는 엄청난 규모의 스펙타클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우선 3시간 30분이라는 상영 시간이 그렇고, 방대한 출연진과 무시무시한 박력을 선사하는 전차경주와 해전 등은 진정한 영화의 묘미를 선사한다.

이 작품 덕분에 와이드스크린의 대작들이 줄줄이 제작되면서 영화산업이 번창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대한극장만 유일하게 70밀리 영사기를 갖춰 이 영화의 좌우로 떡 벌어지는 와이드화면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었고, 다른 극장들은 35밀리 프린트로 상영해 대한극장만큼 영화의 위용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대단한 점은 명장들의 장인 정신에 있다.
지금 같으면 컴퓨터그래픽으로 처리했을 만한 일들을 당시에는 모두 손으로 처리했다.

무려 600여미터 길이의 5층짜리 전차 경주장부터 실제 크기의 갤리선을 직접 만들고, 해전을 찍기 위해 인공 호수를 팠다.
동원된 인원만 엑스트라 포함해 무려 5만명.

저도 모르게 긴장해 보게 되는 아슬아슬한 전차경주 장면도 특수 효과없이 배우들과 스턴트맨들이 부상을 당해가며 직접 찍었다.
그러니 살과 땀으로 빚어낸 사실감이 디지털로 만든 가짜 영화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박진감을 선사한다.

볼거리 뿐 아니라 완벽을 기하기로 유명한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세심한 연출력은 영화의 무게감을 더 한다.
또 이 작품으로 찰톤 헤스톤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으며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그만큼 이 영화는 할리우드의 물량 공세를 과시한 작품이긴 하지만 뛰어난 연출과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 스펙타클한 영상 등이 더해져 와이드스크린의 교과서 같은 작품이 됐다.
무려 반세기 전 작품인데도 영화의 깊이와 진정성이 주는 감동은 여전하다.

1080p 풀HD의 2.76 대 1 와이드스크린을 지원하는 블루레이 타이틀은 3장으로 구성됐으며, 제작연도를 의심할 만큼 최고의 화질로 복원됐다.
더러 포커스가 명료하지 않은 부분도 있으나 생생한 색감과 샤프니스 등을 보면 뛰어난 복원력에 절로 감탄이 나온다.

DTS-HD 5.1 채널을 지원하는 음향은 서라운드 효과가 뛰어나진 않지만 명확하고 섬세한 소리를 들려준다.
주옥같은 부록들은 영화학자와 찰톤 헤스톤의 음성해설, 1925년 제작된 무성영화판 벤허, 풍성한 제작다큐멘터리 등 콜렉터스 에디션으로 출시된 DVD 타이틀과 동일한데, 안타깝게도 한글자막이 전혀 없다.


DVD는 모두 한글자막이 들어 있는데 블루레이는 빠졌으니 제작사의 무성의를 탓할 수 밖에 없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포착한 장면들>

원작은 남북전쟁 당시 장군이었고 훗날 터키주재 미국 공사를 지낸 인디애나주 변호사 출신인 루 월레스가 1880년에 쓴 소설이다. 링컨암살사건의 변호를 맡기도 했던 그는 변호사 일을 싫어해 46세때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5년 만인 뉴멕시코 주지사 시절에 완성했다.
동방박사가 예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찾아오는 장면은 매트페인팅 기법을 이용해 미국 유마에서 따로 찍었다. 와이드 촬영은 화면이 넓게 잡혀 조명을 피사체에 바짝 대지못해 어두울 수 있어서 조명을 많이 세워야 하는 문제가 있다. 조명을 많이 세우면 더워서 배우들이 고생한다.
예수가 태어난 나자렛 마을은 이탈리아 아르나치초 산마을에서 촬영. 주민 300명이 모두 엑스트라로 출연.
이 작품은 작가의 반대로 극화가 미뤄지다가 1889년 처음 연극으로 제작됐다. 연극은 런닝머신을 무대에 설치해 그 위에서 말이 뛰는 방식으로 전차장면을 재현해 성공했고, 20년간 장기공연됐다.
벤허와 메살라가 창 던지는 장면은 배우들이 실제로 했고, 정확히 꽂히도록 창에 끈을 연결해 촬영.
유대 왕자인 벤허의 집은 치네치타 스튜디오에 만든 세트다. 이 작품이 처음 영화화 된 것은 1907년이었으며 상영 시간은 불과 15분이었다. 이후 1925년 MGM에서 2시간 24분 분량의 흑백무성영화를 만들었고 여기에 윌리엄 와일러 감독이 30명의 조감독 중 하나로 참여했다.
벤허의 어머니 역할을 맡은 마사 스코트는 '십계'에서도 찰톤 헤스톤의 어머니로 나왔고, 헤스톤이 추천해 이 작품에 출연하게 됐다. 원래 엄마 역은 뉴질랜드 배우인 미린 나이가 캐스팅돼 일부 촬영을 했는데 와일러 감독이 "우는 연기가 안된다"며 교체했다.
여동생 역인 캐시 오도넬은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처제다. 이 영화를 당시 세계 최대 스튜디오였던 이탈리아의 치네치타에서 찍은 이유는 미국보다 인건비가 싸기 때문이다.
MGM에서 개발하고 파나비전이 애너모픽기술을 적용해 독특한 렌즈시스템을 만든 카메라65로 촬영. 카메라65는 65mm 필름을 사용해 일반 35mm보다 2.75배 더 넓은 영상을 보여준다. 65필름은 네거티브를 어떤 크기의 필름으로도 프린트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35밀리 프린트로도 이 영화를 많이 상영했다.
집사 역의 샘 재프는 당시 매카시즘 열풍에 몰려 공산주의자로 낙인 찍히는 바람에 6년간 일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와일러 감독은 이를 개의치 않고 기용했다.
벤허가 연정을 품는 노예 출신 에스더는 이스라엘 배우 하야 하라렛이 연기. 와일러 감독이 칸에서 만난 그를 기억하고 기용했다.
와일러 감독은 배우들이 모두 푸른 눈이어서 메살라역의 스티븐 보이드에게 갈색 눈처럼 보이도록 콘택트렌즈를 착용하게 했다. 당시 콘택트렌즈는 반투명이어서 앞이 보이도록 렌즈에 구멍을 뚫었으나 그래도 시야를 가려 보이드가 의자에 앉거나 물건을 집을 때 고생했다. 또 렌즈가 자꾸 각막을 긁어 고통을 겪었다.
벤허를 연기한 찰톤 헤스톤은 190cm가 넘는 장신이어서 보이드가 키를 맞추기 위해 키높이 신발을 신었다. 찰톤 헤스톤은 미술학교에서 그림모델을 하다가 브로드웨이 연극무대에 섰다.
죄수들이 사막을 가로지르는 장면은 이스라엘에서 촬영. 원래 리비아에서 촬영 예정이었으나 기독교 영화라는 것을 알게 된 리비아 정부가 촬영 허가를 취소했다. 이 부분은 헤스톤이 캐스팅 전이어서 다른 사람이 벤허 역을 대신했다.
선상 장면 촬영을 위해 갤리선 두 척은 실제 크기로 제작했고, 나머지 배들은 30cm 길이의 무선조종이 가능한 모형이다. 해전을 찍기 위해 치네치타 스튜디오 뒤 쪽에 배를 띄울 수 있는 인공호수를 팠다. 하늘은 배경막이며 사람들이 물을 휘저어 파도를 만들었다.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본명은 윌리 와일러이다. MGM 사장이 감독 이름으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서 개명했다. 그는 촬영 당시 편두통이 너무 심해 촬영을 중단하고 며칠씩 누워 있었다. 그는 1981년 심장마비로 79세 나이에 별세했다.
MGM은 이 영화에 사운을 걸고 사상 최대인 1,500만불을 제작비로 썼다. 만약 이 영화가 망했으면 MGM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행히 흥행에 성공해 8,000만불을 벌었고 아카데미 감독, 작품, 남우주연, 음악, 촬영, 남우조연상 등 무려 11개 부문을 수상했다.
벤허 역에 록 허드슨, 폴 뉴먼, 말론 브란도, 버트 랭카스터 등 당대 최고 스타들이 물망에 올랐고 찰톤 헤스톤은 명단에 없었다. MGM은 폴 뉴먼을 원했으나 그가 거절했다. 와일러 감독은 자신이 찍은 '빅 컨트리'에 출연한 헤스톤을 메살라로 기용하려다가 벤허 역으로 바꿨다.
와일러 감독은 배우들의 억양이 섞이는 것을 원치 않아 유대인 역할은 모두 미국 배우, 로마인 역할은 모두 영국 배우에게 맡겼다.
원래 이 영화는 중간 휴식시간을 기점으로 전반부를 와일러 감독, 후반부를 제작자인 샘 짐발리스트가 감독할 예정이었으나 촬영 도중 짐발리스트가 심장마비로 사망해 와일러가 끝까지 감독했다.
원작자 루 월레스는 가장 좋아한 작품인 알렉산드르 뒤마의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참고해 '벤허'를 썼다. 뒤마는 모함에 빠졌다가 복수에 나선 프랑스 제화공의 실화를 토대로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썼다.
오아시스 장면은 이탈리아 안지오에서 촬영.
찰톤 헤스톤은 제 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4년 미 공군의 전신인 육군 항공대에서 복무했다. '벤허' '십계' '혹성탈출' '미드웨이' 등 대작에 출연한 그는 배우조합장과 전미총기협회장을 지냈다. 말년에 전립선암과 알츠하이머병으로 고생하다가 2008년 4월 84세로 사망했다.
스티븐 보이드가 연기한 메살라 역은 여러 배우들이 물망에 올랐고 그 중 '총알탄 사나이'의 레슬리 닐슨은 스크린 테스트까지 받았다.
전차 경주 장면은 말 78필을 조련해 3개월간 찍었다. 높이 9미터의 거대한 청동상은 4개월 동안 스티로폼으로 만든 뒤 색을 칠했다.
2만2,000평 규모의 길이 610m, 폭 198m, 5층 높이 스탠드를 갖춘 대형 전차 경주장은 실제로 지은 세트다. 촬영 당시 유명인들이 이 곳을 일부러 찾을만큼 관광 명소가 됐다. 전차 경주 장면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소문은 낭설이다.
경주 장면에서 전차에 깔리는 사람은 모두 인형을 이용해 촬영. 전차 경주 장면은 2대의 카메라로 찍었고 여기서 당시 대당 10만달러나 하는 고가의 카메라65 1대가 전차와 충돌해 박살났다.
전차 경주 장면의 박력이 대단하다. 카메라65는 4명이 옮길 만큼 컸다. 촬영을 맡은 로버트 서티스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촬영상을 받았다.
찰톤 헤스톤과 스티븐 보이드는 전차 조정법을 배워 직접 전차를 몰았으나 빠르게 코너를 도는 위험한 장면은 스턴트맨이 대신했다. 전차가 튀어오르는 장면은 파손된 전차 앞에 전신주를 묻고 이 위를 지날때 붕 뜨도록 했다. 이 장면에서 스턴트맨이 튀어나가며 턱이 찢어지는 부상을 당했다.
루 월레스는 기차 여행 중 우연히 극단적 무신론자 로버트 잉거솔을 만났다. 월레스는 잉거솔이 극렬하게 무신론을 주장하자 혐오감을 느껴 '벤허'에 기독교 이야기를 강조했고, 훗날 독실한 신자가 됐다. 월레스는 1905년 작고했다.
나병인 동굴은 로마 근교 대리석 채석장에서 촬영. 당시 이 곳에는 실제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1874년 노르웨이의 한센이 나균을 발견하며 알려진 한센병은 중추신경이 손상돼 감각을 잃어 손발이 썩어들어간다.
헤스톤이 나병에 걸린 여동생을 안은 장면은 어린애를 안고 찍었다. 웅장한 음악은 미클로스 로자가 담당했다.
예수역의 배우는 한 번도 얼굴이 나오지 않는다. 그는 이 작품이 유일한 영화 출연작으로 나중에 미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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