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추천 DVD / 블루레이

열혈남아 (블루레이)

울프팩 2014. 5. 7. 11:38

어떤 판본을 먼저 봤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1980년대 후반 대학 시절에 처음 본 왕가위 감독의 걸작 '열혈남아'(1987년, http://wolfpack.tistory.com/entry/열혈남아-골든-콜렉션)는 왕걸과 엽환의 노래 '汝是我胸口永遠的通'(너를 보낸 내 가슴은 아프고)로 기억한다.

유덕화가 장만옥의 팔을 낚아 채 공중전화 박스로 뛰어든 뒤, 하얗게 부서지는 형광등 불빛 아래서 열렬하게 키스를 나눌 때 흘러 나오던 이 노래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지금도 왕걸의 CD를 듣다가 이 노래가 흘러 나오면 가슴이 뛰며 아련함이 밀려 온다.

그만큼 왕걸과 엽환의 노래는 왕가위 감독의 데뷔작인 이 영화의 장면들과 기막히게 어울렸다.

 

따라서 두 사람의 노래가 없는 '열혈남아'는 상상할 수도 없고,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가짜나 마찬가지다.

홍콩에 가서 이 작품의 홍콩판 DVD와 홍콩판 블루레이를 구입한 것도 같은 이유다.

 

홍콩판 DVD와 블루레이에는 왕걸과 엽환의 노래가 들어 있는 북경어 음성트랙이 수록됐기 때문이다.

2007년 홍콩판을 라이센싱한 DVD가 국내에 나오기 전까지 국내 출시된 DVD는 광동어 트랙만 들어 있었다.

 

황당하게도 광동어 트랙은 왕걸과 엽환의 노래가 빠지고 대신 임억련이 베를린의 원곡을 중국어로 번안해 부른 'Take My Breath Away'가 들어 있다.

비장미가 넘치는 두 사람 노래와 달리 'Take My Breath Away'는 끈적끈적하며 느린 선율이 격정적인 공중전화 키스 장면과 어울리지도 않고, 아련한 감정 몰입을 방해한다.

 

한마디로 홀딱 깬다.

그래서 홍콩판 DVD와 블루레이를 구입했는데, 2007년 국내 출시된 DVD와 이번에 국내에 새로 나온 블루레이에는 다행히 왕걸과 엽환의 노래가 흐르는 북경어 트랙이 들어 있다.

 

그럼에도 아쉬움이 남는 것은 다른 결론이다.

1988년 국내 극장에서 개봉했던 작품은 왕가위 감독이 해외 배급을 위해 만든 대만판이다.

 

대만가수 왕걸의 노래가 들어간 것도 대만판이었기 때문.

대만판의 경우 지금 국내 출시된 블루레이나 DVD, 홍콩판 블루레이 및 DVD와 결말이 다르다.(아래 내용은 스포일러 포함)

 

홍콩판 및 국내판 블루레이는 유덕화의 죽음으로 끝나지만 대만판 및 인터내셔널 극장판은 왕걸의 '忘了汝, 忘了我'(당신을 잊고, 나를 잊고)라는 노래가 흐르는 가운데 바보가 된 유덕화가 감옥에 갇혀 면회 온 장만옥이 먹여주는 귤을 먹는 장면이다.

제대로 씹지조차 못해 뚝뚝 흘리는 유덕화를 보며 장만옥은 눈물을 쏟다가 나오고, 그 뒤로 포장마차 격투씬에 잠깐 등장한 붉은 조명을 뒤로 힘차게 걸어가는 유덕화의 모습이 인서트컷으로 나온다.

 

경우에 따라서는 유덕화의 죽음으로 마무리하는 홍콩판이 깔끔할 수도 있지만, 우리네 정서에는 아련한 감정선을 건드리는 대만판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극 중 유덕화를 그런 식으로 허무하게 떠나보내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것이 VTR이 없어진 지금까지도 이 작품의 비디오테이프를 버리지 못하고 간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에 장학우가 주유소에서 일하는 막내를 찾아가 돈을 건넨 뒤 맥주 캔을 던져버리며 호탕하게 웃고 떠나는 장면도 몇 초 가량 잘려서 편집이 거칠게 튄다.

 

이 부분은 베이스로 삼은 홍콩판 블루레이도 동일하다.

또 엔딩에 흘러나오는 되폴이 되는 대사도 한글 자막이 누락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국내 출시된 블루레이 타이틀은 여러모로 반갑다.

비록 대만판 엔딩은 없지만 홍콩판 블루레이보다 한글 자막도 다듬어진 편인데, 일부분은 오히려 홍콩판 자막이 더 이해하기 쉬운 부분도 있다.

 

이번 국내 정발된 블루레이 타이틀은 2007년 국내 정발판 DVD를 베이스로 했기 때문에 이동진씨의 음성해설도 함께 수록됐다.

그 바람에 이동진 평론가가 대만판 엔딩을 설명하면서 아화가 하반신 불구가 된다고 잘못 얘기한 부분과 '비열한 거리'의 하비 케이틀을 알 파치노로 혼동한 부분도 수정없이 그대로 실렸다.

 

1080p 풀HD의 1.85 대 1 와이드스크린을 지원하는 블루레이 타이틀은 연식이 있다보니 좋은 화질을 기대하기 힘들다.

입자가 거칠고 지글거림이 보이는 등 블루레이 치고는 그저 그런 화질이지만 과거 출시된 DVD와 비교하면 월등 좋아졌다.

 

음향은 DTS-HD 5.1 트랙의 광동어 버전을 선택하면 채널 분리가 잘 돼 있지만, 제 맛을 느끼려면 북경어 돌비디지털 2.0 트랙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부록으로 이동진 평론가의 해설이 실려 있고, 촬영 장면을 잠깐 볼 수 있는 예고편이 함께 들어 있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포착한 장면들>

이 영화는 왕가위 감독이 29세때 만든 데뷔작이다. 

유덕화를 앙각으로 잡은 장면 등 왕가위 감독의 남다른 영상 감각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 많다. 

왕 감독은 홍콩의 중국 귀속을 앞두고 홍콩인들이 앞날에 대해 느끼는 막연한 불안감을 좌충우돌 닥치는 대로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모습 속에 투영했다. 

홍콩에서 태어나 8세때 영국으로 이주했다가 다시 홍콩으로 돌아온 장만옥은 1983년 미스 홍콩 2위에 입상하며 연예계에 데뷔했다. 

결국 이 작품은 실존의 문제를 다뤘다. 살인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하류 인생들의 처절한 몸부림이 주를 이룬다. 

이 장면과 연결돼 나오는 쇼트의 강렬한 적과 청의 보색 대비는 끓어오르는 분노와 냉정한 칼부림을 색상을 통해 그대로 드러낸다. 과거 국내 개봉했던 극장판과 비디오테이프 엔딩에는 이 쇼트가 되풀이돼서 쓰였다.

마치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석양의 무법자'에 나오는 리 반 클리프를 보는 듯한 익스트림 클로즈업 샷. 

왕가위 감독은 선술집 격투 장면을 통해 유명한 스텝 프린팅 기법을 선보였다. 국내에는 점프 프린팅으로도 알려진 이 기법은 필름을 편집할 때 순차 편집하는게 아니라 필요한 프레임만 잘라내 여러번 복사한 뒤 나머지 프레임을 버리고 그 자리에 복사한 프레임을 채워넣는 방식이다. 

즉 스텝 프린팅은 1,2,3,4...로 프레임을 편집하는게 아니라 1,1,3,4,4,4,7...이런 식으로 필요한 프레임을 여러 번 복사한다. 이렇게 되면 영상이 툭툭 끊어지고 뭉개지며 날 것 그대로의 거친 느낌이 난다. 

이 작품은 정작 홍콩에서는 흥행에 실패했다. 국내에서도 마찬가지다. 1988년 서대문 화양극장에서 처음 개봉했을 때는 흥행에 실패해 사나흘 걸린 뒤 사라졌고, 일본에서 크게 히트한 뒤 복사판 비디오테이프가 국내에 들어와 인기를 끌자 1989년 극장에 다시 걸렸다. 

상대의 소굴로 찾아든 유덕화를 상대 조직원이 먹이를 노리는 하이에나처럼 들여다 보는 장면은 관객에게 조직원의 시각에서 숨어서 보는 듯한 느낌을 주며 일촉즉발의 긴장감을 그대로 전달한다. 

극 중 유덕화와 장학우의 관계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비열한 거리'에 등장하는 하비 케이틀과 로버트 드니로의 관계를 연상케 한다. 

이 작품은 이 장면 때문에 찬란하게 빛난다.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터미널로 허둥지둥 달려온 장만옥은 유덕화가 보이지 않자 허무하게 서있는다. 순간, 어둠속에서 쏜살같이 튀어나온 유덕화가 장만옥의 손을 낚아채 공중전화 박스로 달려간다. 두 사람은 하얗게 부서져 내리는 형광등 조명아래 격정적인 키스를 나눈다. 형광등 불빛은 점점 하얗게 타오르며 두 사람의 모습도 함께 바래서 날아오른다. 이때 흘러나오는 유명한 노래가 바로 왕걸과 엽환이 부른 '汝是我胸口永遠的通'(너를 보낸 내 가슴은 아프고)이라는 노래다. 

푸르스름한 형광등 조명은 창백하고 비정한 느낌을 강조한다. 

홍콩에서 왕자오로 부르는 몽콕은 주룽 북부의 유젠왕 구에 있는 홍콩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다. 해안 일대를 매립해 조성한 이 지역은 도박장 등이 몰려있어 돈이 넘치며 그만큼 범죄율도 높다. 

촬영은 유위강이 맡았다. 바로 '무간도' 시리즈를 만든 감독이다. 

결국 영화 속 청춘들이 던지는 메시지는 '각자도생'(各自圖生)한다. 

이 장면도 가슴이 아련하다. 떠나는 연인을 잡지 못해 장만옥이 소리없이 눈믈을 흘리는 장면 위로 왕걸의 '忘了汝, 忘了我'(당신을 잊고 나를 잊고)가 흐른다. 

홍콩판 블루레이에서는 "나한테 잘해 주지 마. 은혜를 갚을 수 없단 말야"로 번역된 장학우의 대사가 이번에 출시된 블루레이에서는 약간 다르게 나온다. 

경찰서 총격 장면도 스텝 프린팅으로 처리됐다.

홍콩판은 총을 맞고 쓰러진 유덕화의 심장이 쿠웅 쿠웅 무겁게 울리는 가운데 막을 내린다. 그러나 대만판은 뒷이야기가 더 있다. 살아난 유덕화가 머리에 총을 맞은 탓에 음식조차 제대로 씹지 못할 만큼 바보가 된다. 그런 그를 면회 온 장만옥이 연인의 입에 귤을 넣어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그때 왕걸의 노래가 아련하게 흘러나온다. 내용, 영상, 음악 모두 왕가위 최고의 영화로 꼽을 만한 걸작이다.

크로아티아 랩소디
최연진 저
열혈남아
열혈남아 : 블루레이
왕가위 감독/장만옥 출연/유덕화 출연
예스24 | 애드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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