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팅, 유니텔, 삐삐.

장윤현 감독의 영화 '접속'(1997년)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것들이다.

 

이 영화가 나와서 인기를 끈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년이 넘었다니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

이 작품은 당시 인기 있었던 PC통신을 매개로 싹튼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다뤘다.

 

요즘으로 치면 인터넷으로 만난 묻지마 사랑 같은 이야기인데, 당시로서는 PC통신과 채팅으로 만난 남녀가 사랑을 하는 이야기 자체를 아주 신선하고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다.

인터넷이 널리 퍼지기 전인 만큼 PC통신을 통한 사랑은 거의 사이버 러버 수준이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이 영화가 서울의 종로 3가 피카디리 극장에서 개봉을 했는데, 영화 속 두 사람이 만남을 시도하는 장소도 피카디리 극장이어서 신기했다.

영화의 소재였던 PC통신은 당시 대세였다.

 

먼저 출범한 천리안과 하이텔을 필두로 해서 나중에 유니텔과 나우누리까지 가세한 PC통신은 당시 많은 젊은이들에게 여론 소통의 장이 됐다.

천리안은 지금은 LG유플러스로 흡수 통합된 데이콤, 하이텔은 한국경제신문에서 1986년 시작했다가 나중에 한국통신(현 KT)과 합작으로 설립한 한국PC통신에서 운영했다.

 

1994년 서비스를 개시한 나우누리는 지금의 아프리카TV 전신인 나우콤에서 운영했고, 영화 속 소재가 된 유니텔은 가장 늦은 1996년에 삼성그룹의 시스템통합(SI) 업체인 삼성SDS에서 만들었다.

유니텔은 나중에 다우기술로 넘어갔다.

 

당시 PC통신은 전화선을 이용해 접속했기 때문에 비싼 전화료를 물어야 했고, 따로 전화선을 하나 개통해 PC통신용으로 사용하지 않는 이상 해당 시간에 전화를 사용할 수 없는 단점이 있었다.

그럼에도 많은 젊은이들이 가족들의 욕을 먹어가며 심야 시간 모뎀을 이용해 PC통신에 접속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영화 속에는 그런 추억들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극 중 라디오 방송 PD인 한석규와 텔레마케터인 전도연은 유니텔 채팅을 통해 서로의 외로움을 나누면서 사랑이 싹트게 된다.

 

당시 어른들은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전화선으로 알게 된 사람끼리 어떻게 연인이 되냐며 말세라고 혀를 끌끌 찼다.

영상통화까지 가능하며 전 세계 사람들과 만나는 요즘 인터넷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지만 당시로서는 기절할 일이었다.

 

이 작품은 이런 사회적 통념의 벽을 뛰어넘어 새로운 만남과 인연을 다뤘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물론 냉정하게 파고들면 두 사람의 만남까지 이어지는 과정이 자연스럽지 못한 부분들이 있다.

 

특히 남녀 주인공을 둘러싼 김태우나 추상미 등 주변 인물들의 행동은 답답한 부분이 많다.

김태우나 전도연의 우유부단하면서도 헷갈리는 행동, 추상미의 PD를 향한 앞뒤 맥락 없는 행동들이 그렇다.

 

하지만 여전히 LP를 듣고 무선호출기, 즉 삐삐의 신호음을 기다리며 하루 종일 전화기 옆에 앉아있던 당시의 마지막 아날로그 정서를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물론 요즘 정서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비단 남녀의 만남뿐 아니라 지금은 사라진 벽돌 같은 무선전화기, 이제는 CGV 계열 멀티플렉스로 바뀐 피카디리 극장, 홈쇼핑이 대신한 텔레마케팅 등 추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갖가지 장치들이 등장한다.

그만큼 이 영화는 당시의 추억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오래된 앨범 같은 작품이다.

 

반면 PC통신 이후 세대에게는 낯선 과거의 이야기가 공상과학물(SF)처럼 다가올 수 있다.

낯선 시대적 간극을 메우는 것은 배우들의 연기다.

 

한석규나 전도연의 진지한 연기는 시대를 뛰어넘어 빠져들게 만든다.

당시 전도연은 TV 드라마에만 나오다가 영화에 처음 출연해 풋풋한 매력이 있었다.

 

물론 지금은 관록 있는 배우가 된 만큼 그런 느낌을 받기는 쉽지 않다.

더불어 이 작품은 음악의 공도 컸다.

 

우리나라 영화로는 처음으로 외국 노래들을 OST로 사용해 PC통신이라는 소재와 더불어 굉장히 세련된 느낌을 줬다.

물론 극 중 사용된 노래들은 1960, 70년대 팝음악들이지만 FM 라디오가 주는 세련된 이미지와 중첩돼 올드팝이 아닌 새로운 음악으로 다가왔다.

 

특히 사라 본이 부른 'a Lover's Concerto'나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Pale Blue Eyes'는 영화 덕분에 사람들에게 다시 인기를 끄는, 요즘 말로 하면 역주행을 했다.

덩달아 OST도 꽤 많이 팔렸다.

 

음악만 따로 회자될 만큼 인기를 끌었으니, 영화와 음악이 찰떡궁합처럼 잘 맞았다는 얘기다.

덕분에 영화는 크게 성공해 당시 전국에서 15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지금은 1,000만 관객 영화도 나왔지만 당시에는 100만 명을 넘어서면 빅 히트작이었다.

1080p 풀 HD의 1.85 대 1 화면비를 지원하는 블루레이 타이틀은 화질이 괜찮다.

 

더러 미미한 플리커링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필름 손상 흔적이나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하다.

우리나라의 열악한 필름 보관상태를 감안하면 반가운 일이다.

 

중간에 한석규가 지하철을 기다리는 장면이 퍼져 보이는 것은 블루레이 타이틀의 문제가 아니라 초점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DTS HD MA 5.1 채널을 지원하는 음향은 사방을 채우는 빗소리가 각 채널에서 고스란히 재현될 만큼 서라운드 효과가 괜찮다.

 

부록으로 장 감독과 심보경 프로듀서의 해설, 시나리오와 캐스팅, 제작과정 및 연출 의도, 전도연과 김태우 인터뷰, 음악 설명, 뮤직비디오와 DVD 구입 팬에 대한 인사 등이 부록 영상으로 수록됐다.

흠이라면 음성해설에서 영화 대사와 배경음악 볼륨이 너무 커서 해설 목소리가  자주 묻힌다는 점이다.

 

더러 예전 국내 타이틀에서 흔히 나타나던 현상인데, 녹음 레벨 조정을 세심하게 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청취자에 대한 배려가 필요한 부분이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극 중 남녀 주인공이 우연히 스쳐지나가는 서울 종로 3가의 피카디리 극장. 공교롭게 개봉도 피카디리 극장에서 했다. 극장 입구에 '콘에어'와 '잉글리쉬 페이션트' 포스터가 보인다.

영화는 LP에 대한 추억을 담고 있다. 이야기는 소포로 배달된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LP에서 시작된다.

극 중 초점이 맞지 않아 퍼져 보이는 부분. 처음에는 제목이 멜로물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견이 많았다.

벽돌 같은 무선전화기가 눈길을 끈다. 제작진은 여주인공으로 친근한 이미지의 배우를 찾아보다가 심은하를 접촉하기도 했다.

유니텔의 채팅창 화면. 남자의 아이디 해피엔드는 감독이 책장에 꽂힌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 제목을 보고 차용했다.

한석규는 처음에 출연 제의를 받아들였으나 시나리오 작업이 길어지면서 제작 일정이 늦어지자 출연을 거절했다. 그래서 다른 유명 남자 배우들을 접촉했으나 섭외에 실패해 나중에 다시 한석규를 설득했다.

독일에서 만든 리메이크작의 제목은 극 중 남녀 주인공의 유니텔 아이디를 이용한 '여인 2와 해피엔드'였다고 한다.

고인이 된 배우 추송웅 씨의 딸 추상미가 PD를 좋아하는 방송작가로 등장. 추씨는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도 하고 북한 동포를 돕는 일을 하고 있다.

잠깐 택배원으로 등장하는 이범수. 출연시간은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준다.

비중 있는 조연을 맡은 김태우는 원래 지하철에서 말 더듬는 것을 고치려는 청년을 맡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감독이 만나보고 조연을 맡겼다.

지금은 사라진 음반점 타워레코드도 등장. 예전 서울 강남역 사거리에 있었던 추억의 장소다.

작품 속에는 여러 개의 답답하고 안타까운 사랑이야기가 얽히고 설켜있다.

제작진은 더스티 스프링필드 노래로 유명한 'The Look of Love' 삽입을 놓고 고민했다. 영화보다 먼저 청바지 광고에 사용됐기 때문.

최철호가 음반점 운영자로 등장.

남자 주인공의 집 장면은 실제 건물에서도 촬영하고 이를 그대로 재현한 세트에서도 일부를 찍었다.

즉석카메라인 폴라로이드 690도 등장. 당시 전 세계에 걸쳐 3,000대만 판매한 제품이라 지금은 구하기 힘든 모델이 됐다.

조영욱 음악감독은 향수를 자극하기 위해 1960,70년대 팝송을 주로 사용했다.

이제는 추억의 물건이 돼 버린 소위 삐삐, 즉 무선호출기가 등장. 지금은 이용자가 많이 줄었지만 여전히 012와 015 번호가 살아 있으며 이용자들이 있다.

거대한 브라운관 컬러 모니터가 눈에 띈다. 마찬가지로 지금은 구하기 힘든 제품이다. 책상 위에 올려놓으면 대부분을 차지했다.

PC통신 유니텔의 초기화면. 저 당시에도 맨 위에 뉴스, 날씨가 떠있다. PC통신은 주로 채팅과 동호회, 불법 소프트웨어를 내려받던 자료실 중심으로 돌아갔다.

말 더듬는 증상을 고치려고 지하철에서 이야기를 하는 청년의 에피소드는 장 감독이 지하철 3호선에서 실제로 겪었던 일이다. 이 에피소드를 계기로 소극적이었던 남녀 주인공은 적극적인 만남으로 바뀐다.

감독이 피카디리 극장을 배경으로 삼은 것은 앞에 광장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모이고 소통하는 장소와 접속이라는 영화 제목이 일맥상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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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진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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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울프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