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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그들이 떠난 파리, 로댕 박물관과 앵발리드

울프팩 2015. 11. 15. 22:24

11월17일은 현대 조각의 문을 연 거장으로 꼽히는 프랑스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이 세상을 떠난 날이다.

1840년 파리 빈민가 라바레트에서 경찰관의 아들로 태어난 로댕은 어려서 근시에 몸이 약하고 내성적이어서 학교 생활에 제대로 적응을 하지 못했다.

 

그림그리는 것만 좋아했던 그는 당연히 성적이 좋지 않아 문맹을 겨우 면한 상태에서 졸업했다.

14세때 루이14세가 누구나 입학할 수 있도록 세운 무료 미술학교에서 점토를 처음 본 로댕은 여기에 흠뻑 빠져 조각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로댕 박물관. 로댕은 37세때 살롱전에 '청동시대'를 선보이며 센세이셔널한 명성을 얻었다. 그는 처음으로 대리석에서 벗어나 청동을 사용한 조각으로 현대 조각의 문을 열었다.]

 

그래서 미술전문교육기관인 에콜 데 보자르에서 공부를 하고 싶어 3년 연속 도전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공방에서 직공으로 일하며 박물관에서 개설한 드로잉 수업과 의대 해부학 수업을 참관하며 조각을 위한 기초를 다졌다.

 

그러던 중 그에게 큰 사건이 터졌다.

로댕이 22세때 하나 뿐인 혈육이던 누나 마리아가 실연의 아픔을 잊기 위해 들어간 수도원에서 천연두에 걸려 25세 나이로 세상을 뜬 것이다.

 

['지옥의 문'에도 조각된 '생각하는 사람'은 파리시에 기증돼 팡테옹 광장에 서 있었다. 이후 1922년 로댕 박물관으로 이송돼 전시되고 있다.]

 

이때 크게 상심한 로댕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수도사가 되기 위해 성령회 수도원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곳에서 자신을 이끌어 준 피에르 줄리엥 에마르 신부의 흉상을 만든 뒤 다시 미술계로 돌아왔다.

 

이후 벨기에에 공방을 열고 이탈리아를 다녀와 대가들의 작품을 본 뒤 로댕의 실력은 일취월장했다.

명성을 얻은 로댕은 1880년 프랑스 정부로부터 장식미술관의 문을 제작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지옥의 문'은 높이 7.75미터, 넓이 3.96미터의 직사각형 조형물이다. 옆쪽으로 가면 로댕의 또다른 대표작 '칼레의 시민들'이 서 있다.]

 

그때부터 로댕이 1916년 세상을 뜰 때까지 37년 동안 작업한 필생의 역작인 '지옥의 문'이다.

로댕은 작품의 영감을 얻기 위해 단테의 '신곡'과 보들레르의 '악의 꽃'을 숱하게 읽고 기베르티의 '천당의 문'을 집중 연구했다.

 

이후 로댕은 거대한 목조틀에 점토를 씌우고 그 위에 석고를 발라 스케치한 그림을 돋을새김했다.

이 위에 환조로 조각한 200명의 서로 다른 인물을 통해 인간의 열정 욕망 고통 등을 표현했다.

 

[따로 커다랗게 조각된 '세 망령들'. 지옥의 문에도 있는 이들은 지옥을 빨리 벗어나기 위해 맨 위에 서 있다.]

 

그런데도 결국 작품은 미완으로 남았고, 그의 사후 1926년에 청동을 부어 오늘날 모습을 갖게 됐다.

로댕은 '지옥의 문'을 만드는 동안 '칼레의 시민'과 빅토르 위고의 조각 등 대표작들도 의뢰받아 작업했다.

 

또 1883년에 로댕은 당시 19세의 여류 조각가 카미유 클로델을 제자로 맞아 들였다.

로댕은 숨겨 놓은 연인이었던 비운의 여인 카미유 클로델을 모델로 '사색', '오로라' 등의 작품을 만들었다.

 

[로댕이란 성은 원래 노르만디 지방의 붉은 색을 의미한다. 이런 성이 붙은 이유는 가족 머리가 모두 붉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로댕은 말년을 친구인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사준 파리의 저택 오텔 비롱에서 보냈다.

로댕은 소장 작품들을 프랑스 정부에 기증하는 조건으로 이 집에서 죽을 때까지 살았다.

 

오텔 비롱은 로댕이 죽고 나서 그가 소장했던 6600점의 조각과 8000점의 스케치와 사진 등과 함께 국가에 기증됐고, 1919년 로댕박물관(Musee Rodin)으로 문을 열었다.

로댕 박물관은 넓은 정원 곳곳에 그의 작품들이 전시돼 있고 건물에 카미유 클로델 전시실도 있다.

 

[로댕은 돈을 벌기 위해 일용직 노동자, 실내장식 등 닥치는 대로 일했고 유적 복원 작업에도 참여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또 한 명의 역사적 인물이 12월15일 파리로 귀환했다.

싸늘한 시신이 돼서 죽은 지 19년 만에 키워 준 프랑스로 돌아온 인물은 바로 나폴레옹이다.

 

프랑스 황제였던 나폴레옹은 1821년 유배지였던 세인트헬레나섬에서 타계했다.

당시 프랑스 왕 루이 필리프는 영국 정부와 7년 동안 협상을 벌여 사후 19년 만인 1840년에 나폴레옹의 유해를 옮겨오게 됐다.

 

[파리의 군사박물관인 앵발리드의 명물 돔 교회.]

 

관에서 꺼낸 유해는 군함에 선적돼 프랑스로 이송됐고 센강을 거쳐 파리로 들어 왔다.

1840년 12월15일 무려 일곱 겹의 관에 든 그의 유해는 수십 마리 말이 끄는 거대한 영구차에 실려 폭설이 쏟아지는 가운데 개선문을 거쳐 생제롬 교회에 도착해 국장을 치렀다.

 

나폴레옹의 유해는 영구 안치할 묘당이 완공될 때까지 교회에 임시 안치됐다가 비스콘티의 설계로 1842년부터 9년에 걸쳐 조성된 지하 묘당의 완성 후 최종 안치됐다.

그의 관이 영구 안치된 곳이 바로 파리군사박물관이 있는 앵발리드(Hotel des Invalides)의 돔 교회다. 

 

[나폴레옹의 유해는 일곱 겹의 관에 넣어 이송됐다. 첫 번째 관은 주석, 두번째는 마호가니, 세번째와 네번째는 납, 다섯번째는 흑단, 여섯번째는 떡갈나무로 만들었고 일곱번째는 러시아산 붉은 석영암으로 만들었다.]

 

센 강만 건너면 앵발리드를 찾아가는 것은 쉽다.

멀리서도 번쩍 번쩍 빛나는 금빛 교회 돔이 보이기 때문이다.

 

앵발리드는 원래 1670년 루이 14세가 전쟁터에서 부상당한 병사들을 돌보기 위해 만든 상이용사들의 요양소다.

루이 14세는 당시 그레넬 평야에 앵발리드를 설립하고 4,000명의 노병을 돌봤다.

 

[앵발리드 군사박물관 전시실 모습. 밀리터리나 무기 마니아라면 아주 좋아할 만한 전시품들이 가득하다.]

 

이들을 돌보기 위한 기금은 현역 병사들의 급료 5년치를 징수한 기금으로 만들었고 리베랄 브뤼앙이 설계한 건물은 1671년부터 1676년까지 공사를 거쳐 완공됐다.

나폴레옹의 관이 안치된 유명한 돔 교회는 루이 16세가 왕실 예배당으로 지은 건물로, 쥘 아르두앵 망사르가 설계해 1706년부터 짓기 시작했는데 1708년 그가 죽는 바람에 로베르 드 코트가 나머지를 완성했다.

 

한때 이 곳은 무기고로 쓰였으며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때 군중들이 여기서 탈취해 간 2만8,000정의 무기로 바스티유 감옥을 공격했다.

교회의 금빛 돔은 55만개의 나뭇잎 모양의 금빛 장식으로 치장됐다.

 

[앵발리드의 돔 교회 내부의 샤를 드 라 포스가 그린 프레스코화.]

 

황금 돔의 높이는 무려 107미터이며 돔 내부의 둥근 천장에는 샤를 드 라 포스가 그린 프레스코화가 있다.

그 아래 나폴레옹의 관과 그를 따르던 장군들, 그의 연인이었던 조세핀의 유해가 안치돼 있다.

 

받침대 위에 올라간 나폴레옹의 관은 거대한 크기로 보는 이를 압도한다.

받침대는 보주 지역에서 가져 온 청록색 화강암으로 만들었고 관은 러시아산 붉은 석영암으로 제작했다.

 

묘당 입구에는 "나는 내가 깊이 사랑한 프랑스 국민에게 둘러싸여 센 강에서 쉴 수 있기를 바란다"라는 나폴레옹의 유언을 새겨 놓았다

앵발리드는 나폴레옹의 묘 뿐만 아니라 파리 군사박물관이 있다.

 

프랑스가 치렀던 각종 전쟁터에서 획득한 군장과 무기, 군기 등의 기념품이 전시돼 있다.

또 지금도 상이용사들과 퇴역군인들이 이 곳에서 요양 생활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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