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추천 DVD / 블루레이

김기영 감독의 원작 '하녀'(블루레이)

울프팩 2015. 1. 11. 11:34

고 김기영 감독이 만든 '하녀'(1960년)는 50여년 전이라는 세월이 무색할 만큼 지금봐도 긴장감 넘치는 걸작 우리 영화다.
공장에서 여공들에게 합창을 지도하는 중년의 음악선생이 우발적으로 하녀와 육체적 관계를 가지면서 온 집 안에 죽음의 공포가 몰아치는 내용이다.

임상수 감독의 리메이크작 '하녀'와는 기본 설정이 같을 뿐 내용 전개방식이 많이 다르다.
2층 양옥집이라는 공간 안에서만 벌어지는 사건은 밀실 추리소설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며 한 집 안에 공존하면 안되는 사람들 사이에 벌어지는 목숨을 건 생존 싸움을 독특한 영상으로 절묘하게 묘사했다.

인물을 따라 앞뒤로 움직이며 공간의 깊이감을 부여하거나 수평으로 움직이며 긴장감을 부여하는 트랙킹 영상은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뛰어나다.
특히 밥과 쥐약, 쥐와 계단 등의 몽타주 샷이 주는 죽음과 공포의 메타포는 히치콕 작품 못지않은 긴장감을 부여한다.

한마디로 놀라운 긴장감으로 응축된 영상들이다.
긴장감 만큼은 롭 라이너 감독의 '미저리'를 능가한다.

더불어 이 작품은 사람의 신경을 있는 대로 자극하는 독특한 음악과 "방금 내 심장은 정전이야" "여자를 보면 원시로 돌아가고 싶어" 등 감각적인 대사들도 일품이다.
막판 연극 같은 엔딩은 김 감독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그래서 봉준호 감독은 이 작품을 가리켜 "한국 영화계의 '시민 케인'같은 작품"이라고 표현했다.
오손 웰즈 감독이 만든 '시민 케인'은 영화학의 교과서로 꼽히는 작품.


감히 그 작품에 비교할 정도이니 이 작품의 완성도가 얼마나 뛰어난 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얼마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다시 만든 블루레이 타이틀은 국내 출시된 DVD와 동일하게,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주관하는 세계영화재단의 지원으로 복원이 이뤄져 2008년 칸영화제에서 상영된 판본을 토대로 한다.


1.53 대 1 와이드 스크린을 지원하는 블루레이 영상은 50년 전 작품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화질이 괜찮다.

다만 흑백영상이고 워낙 오래된 작품이어서 DVD와 화질 차이가 크게 나지는 않는다.

문제는 원본 필름이 사라진 중간의 20분 분량을 듀프 네가를 통해 복원하다보니 화질이 급격히 떨어지는 부분이 있다.
해당 부분은 콘트라스트가 무너지고 윤곽선이 뭉개지긴 하지만 감상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다.

음향은 DTS-HD 모노를 지원한다.

부록으로 박찬욱 감독과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해설, 마틴 스콜세지의 작품 평가, 영화감독들의 김기영 감독에 대한 회고, 김 감독의 초기작인 '죽엄의 상자'와 김 감독이 연출한 계몽영화 '나는 트럭이다' 등 다채롭게 들어 있다.

 

DVD보다 부록이 많은 점이 반갑고, 특히 음성해설에 한글 자막까지 지원하는 점이 아주 좋았다.

다만 DVD에 실린 음성해설은 봉준호 감독과 김영진 영화평론가가 공동 진행해 블루레이와 또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DVD와 블루레이에 각각 실린 소책자도 내용이 약간 다르다.

김 감독의 필모그라피와 약력, 개봉 당시 언론 평문 발췌 등은 같지만 나머지 내용들은 다르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쳐다보기만 해도 오싹한 공포감을 주는 연기가 일품. 하녀 역을 연기한 당시 신인배우 이은심은 이성구 감독의 부인이다. 

초반 인트로 등장하는 손은 김기영 감독의 손이다. 인트로 자체도 참으로 그로테스크하다.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인간 관계를 상징하는 듯한 인트로의 실뜨기. 남매 중 동생으로 나온 아역배우가 바로 안성기다. 1960년 출연 당시 7세였다. 

수직 줄무늬 같은 배경과 길게 걸린 그림 등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공간. 남자의 직업은 공장에서 여공들의 여가활동을 위해 합창반을 지도하는 음악 선생이다. 음악 선생은 작고한 대배우 김진규가 연기. 배우 겸 감독으로도 활동한 김진아의 아버지다. 

결코 남자는 잘사는 집안이 아니다. 서민층에서 중산층으로 막 올라서는 단계다. 그래서 남자는 합창반 지도 외에 부업으로 피아노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여자는 집에서 재봉틀을 돌리며 옷수선을 하는 맞벌이 집안이다. 그렇다보니 남자에게는 어렵게 이룬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강렬한 욕망이 존재한다. 

살아서 꿈틀거리는 쥐를 남자도 만지기 힘든데 태연히 집어드는 여배우의 연기가 놀랍다. 이은심은 출연 당시 만 19세였다. 

사건의 대부분은 남자의 2층 집에서 벌어지기 때문에 거의 밀실 공포물에 가깝다. 특히 하녀의 동선을 따라 움직이는 수평 트랙킹은 닫히면서도 열린 공간을 보여주며 긴장감을 유지하는 절묘한 장치처럼 작동한다. 

쥐와 밥, 쥐약이 어우러진 몽타주는 이 작품에서 삶과 죽음의 메타포 역할을 한다. 김 감독은 일본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어 일본어를 아주 잘했다. 

잘록하다 못해 부러질 것 같은 허리를 가진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여공 역할의 배우가 바로 엄앵란이다. 요즘 TV에서 보는 모습과 깜짝 놀랄 만큼 다르다. 

계단은 쥐약과 더불어 이 작품에서 죽음의 공포를 유발하는 장치로 쓰인다. 높다란 계단 위에서 마치 굴러 떨어질 듯 아슬아슬한 몸싸움을 앙각으로 치받은 영상은 긴장감이 일품이다. 

키스 조차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던 시절, 여배우의 상반신 누드는 비록 뒷모습이지만 파격적이었다. 5.16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에 개봉했기에 다행이지, 박정희 군사 정권이 들어선 이후였다면 절대 개봉하기 힘든 작품이다. 

흑백TV의 추억을 불러 일으키는 장면. 당시 금성사, 대한전선 등에서 나왔던 흑백TV는 네 귀퉁이에 다리가 달렸고, 브라운관 앞에 좌,우로 여닫는 문이 있었다. 

김 감독의 작품은 소품이나 배경 등이 어우러진 미장센느가 독특한 느낌을 불러 일으킨다. 피아노 위에 걸린 서로 다른 표정의 흑색과 백색 탈은 마치 이중적인 사람의 마음을 조소하는 듯 하다. 

피아노 방은 서구적 느낌의 괴이한 문양과 벽에 걸린 희한한 장식들이 한복을 입은 배우들과 어울리며 언밸런스한 이질감을 준다. 낙태를 부추기는 부인 역할은 작고한 배우 주증녀가 연기. 

김영진 영화평론가에 따르면 59년은 6.25 이후 처음으로 집값이 뛰며 부동산 광풍을 불러 일으켰고, 토지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며 도시 빈민을 양산하던 혼란기였다고 한다. 서울에 상경한 여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여공 아니면 식모, 즉 하녀였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시대상이 다분히 반영됐다. 

절로 오싹해지는 장면. 임상수 감독의 리메이크작 '하녀'에서 전도연이 아이 방을 들여다보며 생글생글 웃는 장면과 대조적이다. 

아파트가 많이 늘어나면서 지금은 도시에서 거의 쓰지 않지만, 60~70년대에는 나라에서 쥐잡는 날을 정해놓아 집집마다 쥐약이 있었다. 그 바람에 쥐약을 잘못 먹고 죽거나 이를 이용해 벌이는 살인이 많았다. 

한 집안에 공존하기 힘든 사람들이 살다보니 마찰과 긴장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 김 감독은 전경과 후경에 고루 포커스가 맞아 깊은 심도를 유지할 수 있는 35미리 렌즈를 선호했단다. 원본 네거티브가 유실되는 바람에 듀프 네거로 복원해 영상 톤이 원본과 다르다. 

50년 전을 감안하면 파격적인 영상. 김 감독은 보는 사람의 심리를 자극하는 대사와 영상들을 적절하게 잘 사용했다. 감독 자신이 사람의 심리에 관심이 많아 프로이드 책을 탐독하고 열심히 연구한 결과인 듯. 

살려고 먹는 밥이 죽음의 도구가 될 수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또다른 공포를 빚어낸다. 이쯤되면 밥을 먹는 것 자체가 악몽이 된다. 

1919년생인 김 감독은 지금의 서울대 치대를 나와 60년에 한국문예영화사를 세우고 영화 제작과 감독을 겸했다. 

김 감독은 '하녀'가 크게 성공한 뒤 '화녀' '충녀' 등을 잇따라 제작했고, 1998년 2월 '악녀' 제작을 앞두고 집에 전기 합선으로 화재가 발생해 부인과 함께 사망했다. 항년 76세. 당시 김 감독은 며칠 뒤 베를린영화제에서 열릴 예정인 그의 회고전에 부인과 참석할 예정이었다.

영화 전반 3분의 1은 로맨스처럼 흐르고 이후는 하녀와 가족이 벌이는 사투로 이어진다. 그 바람에 이처럼 무섭고 섬찟한 장면들이 속출하는데 리메이크작은 이를 다 날려버렸으니 긴장감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이 작품은 김 감독이 당시 김천에서 하녀가 어린애를 저수지에 빠트려 죽인 사건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 현악기를 제외한 한상기의 음악이 인상적이다. 

두고두고 잊지못할 참으로 독특한 엔딩. 이 장면의 대사는 아주 통렬하다. "그게 남자의 약점이야. 높은 산을 보면 올라가고 싶고 깊은 물을 보면 돌을 던지고 싶고 여자를 보면 원시로 돌아가고 싶어...남자란 나이가 많을 수록 젊은 여자를 놓고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집니다. 그러니까 여자한테 걸려들기도 쉽고 때에 따라 패가 망신하는 수도 있죠. 아니라고 고개를 흔드는 선생도 매한가지요."

하녀 (1Disc) : 고전의재창조
김기영 감독
크로아티아 랩소디
최연진 저
하녀 : 블루레이
예스24 | 애드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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