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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노스페이스

울프팩 2010. 6. 5. 07:28
노스페이스.
많은 사람들이 가방과 의류 브랜드를 먼저 떠올리겠지만, 이 말은 알프스산에 위치한 아이거 북벽을 가리킨다.

아이거 북벽은 산악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오르고 싶어하는 꿈의 봉우리다.
높이는 해발 3,970m로 히말라야 봉우리들에 비하면 절반에도 못미치지만 수직 절벽이 무려 1,800m에 이르고 수시로 변하는 날씨와 낙석, 눈사태가 이어지는 죽음의 코스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나라 산악인들을 포함해 60여명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어 산악인들의 공동묘지로 불리기도 한다.

아이거 북벽이 처음 정복된 것은 1938년이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합동 등반대가 초등했는데, 사실 이들의 초등은 그들보다 앞서 1936년에 도전했다가 목숨을 잃은 독일인 토니 쿠르츠와 앤디 힌터슈테이서 덕분이었다.

필립 슈톨츨 감독의 영화 '노스페이스'(Nordwand, 2008년)는 바로 토니 쿠르츠와 앤디 힌터슈테이서의 실화를 다룬 산악 영화다.
베를린 올림픽을 앞둔 나치 독일은 국위 선양을 위해 젊은이들에게 당시까지 아무도 오르지 못한 아이거 북벽 등반을 부추긴다.

실제로 나치는 "독일 청년들은 등산을 통해 남성적인 힘을 기르고 멋지게 죽는 법을 배운다"며 등산을 국가의 결속력과 신화적 이념을 만드는데 적절히 이용했다.
토니와 앤디도 나치 이념에 동조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이용당했다.

영화는 이들이 북벽에 도전하는 과정을 다큐멘터리처럼 담담하게 그려낸다.
아무래도 드라마이다 보니 친구와의 우정과 로맨스, 휴머니즘이 적절히 가미돼 캐릭터를 윤택하게 묘사하지만 등반 과정 자체는 어떠한 기름끼도 가미하지 않고 냉철하게 묘사했다.

그래서 그 과정을 보노라면 손발이 얼어붙고 숨을 쉬지 못할 만큼 아찔한 긴장의 연속이다.
거대한 자연의 위용 앞에서 두 청년이 목숨을 잃는 순간에도 카메라는 감정 과잉없이 냉정을 유지한다.
그렇기에 그 과정이 더더욱 마음아프다.

산악 영화로서 '버티칼 리미트' '클리프 행어' 'K2' 같은 픽션보다 오락적 재미는 떨어질 지 몰라도 등반에 대한 사실적 묘사만큼은 그 어떤 작품보다 훌륭하다.
그렇기에 위대한 자연의 품에서 숨져간 산악인들의 사투가 가슴을 절절하게 울린다.

아이거 북벽 정복을 위한 등반 코스에는 실제로 힌터슈테이서 트래버스라는 곳이 있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힌터슈테이서가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방법으로 몸을 던져 건넌 절벽이다.

1938년에 아이거 북벽을 처음 정복한 등반대는 힌터슈테이서 트래버스를 건너 올라갔다.
대신 그들은 힌터슈테이서의 잘못에서 배워 그곳에 밧줄을 남겨두고 간 덕분에 목숨을 잃지 않고 내려올 수 있었다.

힌터슈테이서 트래버스를 지나면 굉음을 울리며 수시로 돌덩이가 쏟아져 내린단다.
그곳을 통과하면 아이거 북벽의 상징 '하얀 거미'가 모습을 드러낸다.

엄청난 규모의 설원이 마치 거대한 거미가 다리를 있는대로 벌려 절벽에 매달린 모습을 닮아 이런 이름이 붙었단다.
이곳이 마지막 정복 코스다.

우리 등반대는 2년여의 준비와 3개월 합숙 훈련을 거친 뒤 1979년에 처음 아이거 북벽 등정에 성공했다.
오히려 에베레스트 등정 성공은 이보다 빠른 77년 9월에 이룩했다.
그러니 아이거 북벽이 얼마나 험한 곳인 지 알만하다.

개인적으로 등산을 좋아하기에, 대학 시절인 20여년 전 친구들과 설악산 대청봉에 올랐다가 쏟아지는 폭우를 뚫고 하산하던 중 조난을 당한 적이 있다.
당시 설악산 인근 구조대가 총출동할 정도로 큰 사고였으나 다행히 친구들은 구조를 받고 나는 어찌어찌 내려와 목숨을 건졌다.

그때 산의 무서움을 절감한 뒤 산에 오르면 낮든 높든, 쉽든 어렵든 무조건 조심한다.
남보다 잘탄다고 자만하지 않고 항상 산에 대한 두려움을 달고 산에 오른다.

그래서 정상에 섰을 때 공포 뒤에 오는 짜릿한 쾌감과 더불어 겸손을 배운다.
그것이 산에 오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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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거 북벽
정광식 저
신들의 봉우리 1
타니구치 지로 글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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