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이 열리던 해였으니 1988년으로 기억한다.
새 학기가 시작돼 대학에 수강신청을 하러 갔다가 고교 후배를 만났다.
점심을 먹으며 영화 얘기를 하던 중 녀석이 갑자기 "죽이는 영화를 봤다"며 입에 침을 튀기기 시작했다.
녀석 왈, "최근 일본에서 붐이 일어난 작품인데, 국내에서는 지난해 말 변두리 극장에 며칠 걸렸다가 사라졌다"며 "최근 비디오테이프를 빌려 봤는데 극장에서 못 본 게 한이 될 만큼 멋진 작품"이라고 열변을 토했다.
그 작품이 바로 왕가위(王家卫) 감독의 데뷔작 '열혈남아'(As Tears Go By, 1987년)였다.
궁금함을 참지 못해 그날 당장 비디오테이프로 빌려본 작품은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당시 더블데크가 없어 VTR을 재생하며 TV에 연결된 비디오카메라로 녹화를 뜬 뒤, 이를 다시 VTR로 옮기는 2번의 작업을 거쳐 복사한 테이프를 100번 이상 봤다.
어찌나 많이 봤던지 특정장면 대사는 중국어 발음을 줄줄 흉내 냈고 왕걸과 엽환이 부른 노래도 거의 외우다시피 했다.
'열혈남아'가 그토록 나를 미치게 했던 것은 아련함이었다.
한창 감수성 예민하고 열정으로 피가 끓던 청춘에게 왕가위가 던진 허무와 분노, 열병 같은 사랑의 영상과 음악은 어찌할 수 없는 슬픔과 분노가 범벅된 안타까움 그 자체였다.
당시 학생들의 시위와 민주화 운동으로 시끄럽던 시대상하고도 맞아떨어졌다.
그렇게 청춘의 한 때가 고스란히 기억된 복사본 비디오테이프를 지금도 갖고 있다.
DVD까지 출시됐는데도 불구하고 영상마저 희미하게 바랜 테이프를 소중히 간직하는 이유는 무삭제판이기 때문이다.
국내는 물론이고 홍콩, 대만에 출시된 DVD 타이틀은 기가 막힌 엔딩과 왕걸의 노래가 삭제된 홍콩판이다.
원래 국내 상영본인 대만판은 총 맞은 유덕화의 뒷 이야기와 서러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 왕걸의 주제가, 엽환과 왕걸이 듀엣으로 부른 삽입곡이 들어있다.
그래서 DVD와 별도로 비디오테이프를 간직해 오다가 최근 홍콩에서 나온 골든 컬렉션 DVD를 다시 구입했다.
엔딩은 비록 잘려나갔지만 왕걸의 주제가, 왕걸과 엽환의 듀엣곡이 고스란히 복원됐기 때문이다.
16 대 9 애너모픽 와이드 스크린을 지원하는 골든 컬렉션 DVD 타이틀은 화질이 좋지 않다.
물론 비디오테이프보다는 깨끗하고 좋지만 색상도 번지고 어두운 부분의 세부 묘사가 떨어진다.
음향은 광둥어의 경우 DTS까지 지원하는데, 왕걸의 노래를 제대로 들으려면 돌비디지털 2.0 채널로 녹음된 북경어를 선택해야 한다.
광둥어를 선택하면 황당하게도 왕걸과 엽환의 노래 대신 베를린의 'Take My Breath Away'가 흐른다.
한마디로 홀딱 깬다.
따라서 과거의 아련함을 느껴보려면 반드시 북경어로 들어야 한다.
아울러 온전한 엔딩을 볼 수 있는 대만판이 DVD 타이틀로 나왔으면 좋겠다.
<DVD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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