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메모장

이소룡의 미스테리

울프팩 2010. 12. 24. 23:49

[ 이소룡은 스트리트 파이터? ]

이소룡은 어려서 대단한 싸움꾼이었다.
쿵푸를 배운 중학교 시절부터 또래 친구들과 곧잘 길거리에서 싸움을 벌였다.
주로 그가 먼저 시비를 거는 스타일이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중국 전통의상을 입고 돌아다녀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
사람들이 쳐다보면 왜 쳐다보냐며 시비를 걸어 싸움을 했다.
이소룡 동생의 회고에 따르면 하루에 최소 두 번 이상 싸움을 벌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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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권도를 본격적으로 가르치고 영화를 찍기 시작한 뒤로는 반대가 됐다.
사람들이 그의 실력을 가늠해 보기 위해 도전을 해왔다.

어지간해서 그는 도전에 응하지 않았지만 인격적인 모욕을 당해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면 상대가 꼼짝 못하도록 제압했다.
영화 '용쟁호투' 촬영장에서도 그런 일이 곧잘 벌어졌다.

300명의 엑스트라를 홍콩의 무술도장에서 뽑아오다보니 이소룡을 보고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소룡은 그 중 유독 심한 상대를 하나 골라 수 많은 사람들 앞에서 완패시켰다.

그 후 이소룡에게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없어졌고, 이소룡의 말을 잘 따랐다.
이소룡 또한 쿨하게 대결 사실을 깨끗이 잊고 사람들을 대했다.

홍콩에서 영화로 크게 성공한 뒤에도 길거리에서 그에게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찬가지로 이소룡은 상대를 하지 않았지만, 불가피하게 대결을 벌이면 상대가 꼼짝못하도록 만들었다.
그야말로 최고의 파이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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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소룡은 마약 중독? ]

심한 약물은 아니지만 이소룡은 마리화나를 사용했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휴식을 취할 때면 간간히 마리화나를 복용했으나 중독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 이해천도 아편을 복용했고, 사부인 엽문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중국인들, 특히 상류층일수록 아편은 담배같은 기호품이었다.

이소룡은 마리화나를 섞은 과자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죽기 일주일 전에도 마리화나 과자를 먹었다.

사망 후 그의 사체에서는 마리화나 성분이 검출됐다.
그러나 검시의는 이를 공식 발표하지 않았다.

당시 이소룡이 죽기 직전에 생명보험에 가입했기 때문이었다.
이소룡은 보험 가입 신청서에 마약류 복용 경험이 없다고 적었다.
검시의는 보험을 둘러싼 말썽을 우려해 마리화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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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소룡은 암살당했다? ]

이소룡은 충분히 살릴 수 있었다.
이소룡이 불륜 관계인 여배우 베이 팅 페이의 아파트에서 페이가 준 두통약 에콰제직을 먹고 쓰러졌을 때
이소룡은 숨을 쉬고 있었다.

페이는 이소룡을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자 당황해 30분을 그냥 흘려보냈다.
이후 병원이나 경찰이 아닌 골든하베스트 사장 레이몬드 쵸에게 제일 먼저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했다.

당시 쵸 사장은 홍콩의 페이 아파트에서 가장 먼 지점에 있었다.
쵸 사장이 엄청난 교통 체증을 뚫고 페이의 아파트에 도착한 것은 전화를 받고 1시간이 지나서였다.

그때까지도 이소룡은 의식이 없었지만 숨을 쉬고 있었다.
쵸 사장이 구급차를 불러 병원에 도착했을 때에도 여전히 숨을 쉬고 있었다.

의사들은 그의 강인한 생명력에 놀랐지만 그를 살릴 수는 없었다.
그렇게 허무하게 두어시간을 흘려보내지만 않았어도 이소룡은 되살아 날 수 있었을 지 모른다.

그래서 이소룡의 어머니와 동생 등 유족들은 이소룡이 암살당했다고 주장한다.
이소룡의 친구들 중에도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있다.

한편 베이 팅 페이는 이소룡 사망 후 대만 출신 사업가와 결혼해 옷가게를 운영했고, 이혼한 뒤에는 나이트클럽 가수를 했으며 한때 절에 들어가 비구니 생활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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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소룡은 한국을 촬영지로 골랐다? ]

사실이다.
이소룡이 직접 대본을 쓰고 제작하고 주연 및 무술지도까지 한 미완성 유작 '사망유희'의 무대는 한국이었다.

사후 몇 년이 지나 발견된 이소룡의 '사망유희' 친필 대본을 보면, 이 영화는 은퇴한 무술가가 죽음의 5층탑에 도전하는 내용이다.
그 장소가 바로 속리산에 있는 법주사다.

이소룡은 제작 노트에 33미터 청동불상과 그 앞에 5층 목탑을 주요 장소로 적어 놓았다.
각 층마다 무술 고수들이 버티고 있어 이들을 격파한다는 내용.

그 중에 한국의 합기도 사범 지한재도 있었고, 이소룡에 쌍절곤을 가르친 댄 이노산토, 이소룡의 제자인 농구선수 카림 압둘 자바도 있다.
'사망유희'는 탑의 무술 고수들과 대결하는 장면만 이소룡이 촬영해 놓고 죽어 미완성인 상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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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소룡은 적이 많았다? ]

이소룡은 고집이 셌고, 직선적이며 날카로운 성격이었다.
특히 지기 싫어하는 성격 탓에 적을 많이 만들었다.

홍콩에서 영화를 찍을 때에도 공공연히 무술계의 다른 유파와 전통 쿵푸를 비난하는 발언을 해서 중국 무술계의 미움을 샀다.

홍콩 영화계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소룡은 홍콩 영화사상 처음으로 배우 겸 제작자를 겸한 인물이었다.

그는 대단한 흥행 성공을 거둔 후 수익을 동료 연기자 및 스탭진과 공평하게 나눴다.
당시 제작자가 독식하던 홍콩 영화계에서 이 같은 그의 행동은 당연히 눈에 났다.
더욱이 손대는 영화마다 성공을 거두니 홍콩 영화계의 시기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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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소룡의 운동법 ]

이소룡은 그만의 독특한 운동법이 있었다.
일부는 흑백 홈비디오 영상으로, 일부는 제자 동료 가족의 증언으로 남아 있다.

그는 팔굽혀 펴기도 한 손은 뒷짐을 지고 한 손의 엄지와 검지 두 손가락만으로 했다.
국제 가라테선수권 대회에 출전해 이를 시범 보이는 동영상이 지금도 남아 있다.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권상우가 하체 전체를 들어올리는 윗몸일으키기도 이소룡이 하던 운동이다.
권투 선수들이 하는 메디신 볼로 복부를 내려치고, 주먹의 스피드를 올리기 위해 하루 종일 무거운 역기를 들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삼두근을 강화하기 위해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에도 손을 뒤로 돌려 벽을 밀었다.
또 바람에 날리는 종이 조각을 발로 차는 훈련으로 발차기의 정확성을 높였다.

그는 운동 뿐 아니라 인삼, 로열젤리, 복합 비타민 등 각종 영양제와 고단백 음료를 만들어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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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소룡의 절권도 교육 ]

이소룡이 절권도를 가르치면서 상대를 쓰러트리고 목을 졸랐다.
상대는 팔 다리를 전혀 못쓰는 상태에서 꼼짝없이 목이 졸렸다.

그때 이소룡이 상대에게 던진 말이 절권도의 모든 것을 대변한다.
"물어라. 죽는 것보다 낫다. 팔 다리를 쓸 수 없다면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총동원해라."

그래서 절권도는 격식이 없다.
언제 어떤 상황이 닥칠지 모르니 품세나 격식에 얽매이면 안된다는 것이 이소룡의 지론이었다.

이소룡 말마따나 절권도는 "무권법이 권법"인 무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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