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영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울프팩 2009. 5. 17. 08:53

오래전 홍상수 감독의 어떤 작품 언론시사회를 다녀온 뒤 호된 비판을 한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재미있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나온 작품들과 궤를 같이 하는 그의 끝없는 자기 복제가 지나쳤다고 봤기 때문이다.
적어도 돈을 받고 상영하는 상업 영화 감독이라면 그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 작품을 다시 본다면 그렇게 비판하지 않을 것 같다.
어느덧 자기 복제는 그의 색깔이 돼버렸다.
이제는 망하든 흥하든, 우디 앨런처럼 자기 스타일을 고집하는 그의 '선택'을 존중한다.

그의 9번째 작품인 '잘 알지도 못하면서'도 자기 복제는 여전하다.
심지어 김태우, 고현정 등 그의 전작들에서 등장한 배우들도 계속 출연한다.

이 작품은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영화감독이 자신의 선후배들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황당하고 허무한 사건들을 다뤘다.
여전히 돌발적으로 만난 남녀가 벌이는 황당한 대사와 뜻밖의 사건들이 보는 이를 당황스러우면서 재미있게 한다.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갖고 찍었는 지 의아한 인서트 컷들과 앵글에 대한 고민이 있었는 지 의심스러운 무신경한 프레임, 대충 툭툭 끊어놓은 듯한 거친 편집 등 홍 감독 특유의 무신경하고 심드렁한 영상 또한 여전하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영상들은 마치 사람이 '물끄러미' 쳐다보는 시선을 닮았다.
무심코 고개를 휘 돌렸을 때 망막에 마구잡이로 걸리는 그런 영상들이다.

공들여 미장센느를 구축한 작품들과 비교하면 무성의해 보일 수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가장 자연스러운 영상일 수 있다.
덕분에 그의 작품은 굳이 의미 부여나 해석의 피곤함 없이 편안하게 풀어져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번 작품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남녀간의 일을 사람들이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그건 결국 당사자들만이 알 수 있는 암호해독 같은 일들이다.
여기에 제 3자의 잣대를 들이댔을 때 갖가지 억측과 오해가 난무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영화는 제목그대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는 사람들을 조롱한다.
심지어 이야기도 그렇게 흘러간다.

영화 속 주인공(김태우)이 후배(공형진)의 집에 다녀간 뒤 후배의 아내(정유미)를 두고 벌어지는 갑작스런 반전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
어차피 그것도 주인공과 후배의 아내, 즉 당사자들 사이에서만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관객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사건을 유추하게 된다.
거기서 벌어지는 오류는 관객의 책임이다.

이처럼 홍 감독 특유의 스타일을 즐길 수 있다면 이 작품 또한 예전 작품들처럼 재미있게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외수의 소설들이 변하듯 달라져가는 김기덕 감독의 작품들에 대해 안타까워 했는데, 홍 감독은 여전한 듯해서 반가운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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