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영화

택시운전사

울프팩 2017. 8. 9. 19:14

1980년대 학번들은 대부분 대학에 들어가서 광주 민주항쟁을 기록한 영상들을 봤다.
총학이나 사회과학 동아리에서 주로 틀어주던 영상들은 대부분 조악한 화질의 비디오였다.


영상은 대단히 잔혹해서 마치 공상과학(SF) 영화를 보는 것처럼 비현실적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전까지 엄격한 정부의 보도 관제로 TV 뉴스 등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던 영상이었기 때문이다.


소설가 황석영이 생존자들의 구술을 기록한 책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군사정권의 금서 목록에 묶여 있던 이 책에 기록된 공수부대원이 대검으로 임산부의 배를 찔렀다던가 여학생의 젖가슴을 도려냈다는 대목 등은 너무 참혹하고 공포스러워 영화 '몬도가네'를 보는 듯한 이질감을 줬다.


장훈 감독의 '택시운전사'를 본 20, 30대 중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광주 민주항쟁의 기록 영상을 보거나 책자 등을 읽은 경험이 없는 이들은 영화 속에서 공수부대원들이 비무장인 광주 시민들을 총으로 학살하는 장면이 너무 처참해 비현실적으로 보였다는 토로였다.


그만큼 우리의 아픈 역사인 광주 민주항쟁이 잔혹했다는 반증이다.
영화는 새삼스럽게 여러 가지를 돌아보게 했다.


이 영화는 그 잔혹했던 영상들을 처음 봤을 때 가졌던 촬영자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해 주는 실화다.
영화 속 인물인 독일 방송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를 비롯해 월스트리트 저널의 노만 소프, 볼티모어 선의 브래들리 마틴 등 10여 명의 외신기자들은 당시 총알이 쏟아지는 광주에서 목숨을 내놓고 사실을 기록했다.


광주 시민들은 이들을 열렬히 응원하고 극 중 택시운전사들처럼 목숨을 걸고 도왔다.
외신기자들이 환영을 받은 이유는 국내 언론들이 외면한 광주의 외로운 싸움을 세상에 알린 유일한 창구였기 때문이다.


광주 시민들은 불량배들의 폭동으로 오도한 국내 언론들의 보도를 보며 세상에서 잊히고 고립됐다는 분노와 슬픔이 컸을 것이다.
그래서 광주 MBC 방화로 이어졌고 영화처럼 외신기자들을 도울 수밖에 없었다.


이 영화가 훌륭한 것은 이 과정을 절대 감정과잉 없이 절제된 영상으로 담담하게 전하는 점이다.
때로는 말 없는 침묵이 대성통곡보다 더 가슴 아픈 것처럼 절제된 영상은 더 한 감정의 파고를 만든다.


특히 감탄한 장면은 금남로의 총격 장면이다.
장훈 감독은 이 장면을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걸작 '전함 포템킨'에 나오는 계단 학살 장면처럼 몽타주 기법으로 처리했다.


군인들이 겨누는 총과 거리를 질주하는 사람들, 슬로 모션으로 탄피가 튀는 장면, 꽃가루처럼 흩날리는 핏방울, 거리를 뒹구는 사람들을 잇따라 편집해 보여주면서 더 할 수 없이 강렬한 분노와 슬픔, 공포를 느끼게 만들었다.
더불어 안개처럼 자욱하게 깔린 최루탄 가스 사이로 우뚝 우뚝 솟은 군인들이 천천히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동양화를 보는 것처럼 이질적인 아름다움을 준다.


이 대목은 장 감독의 이전 영화 '고지전'에서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남북한 군인들이 '전선야곡'을 부르던 대목을 생각나게 한다.
거리에 나뒹구는 주인 잃은 신발, 돌조각 등을 낮은 앵글로 잡은 영상은 당시 광주가 전쟁터 못지않게 참혹하고 격렬한 투쟁의 공간이었다는 점을 장면 하나로 확실하게 보여줬다.


이는 수많은 웅변조 대사들보다 확실한 힘을 발휘했다.
그만큼 장 감독은 영상의 힘을 제대로 알고 이를 적절하게 활용할 줄 안다.


그러면서 장 감독이 일관되게 유지하는 것은 휴머니티에 대한 애정이다.
'고지전'에서 남북한군 모두를 똑같이 가족을 그리워하고 살고자 하는 강한 욕망에 몸부림치는 인간으로 다뤘던 것처럼 이 작품에서도 광주 시민들을 거창한 대의명분에 팔 걷고 나선 의사나 영웅이 아닌 본능적 공포와 아픔에 반응하는 인간 그 자체로 그렸다.


그래서 극 중 택시운전사의 뺨을 타고 조용히 흐르던 눈물이 대성통곡보다 더 슬프게 다가웠다.
우리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정서에 호소했기 때문이다.


굳이 역사 다큐멘터리처럼 정치인들을 등장시켜 시대 배경을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고 현장의 민초들에만 집중한 것도 좋았다.
이런 휴머니티에 대한 장 감독의 천착이 이 영화의 성공 포인트 중 하나다.


여기에는 국민배우 송강호의 힘이 큰 보탬이 됐다.
'변호사'처럼 과장되지 않은 그의 자연스러운 연기는 천생 배우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그를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정말 택시운전사가 아니었을까 싶을 만큼 훌륭한 생활연기를 선보였다.
특히 압권은 혜은이의 '제 3 한강교'를 부르던 장면이다.


영화 시작과 함께 흐르던 조용필의 '단발머리'를 따라 부를 때 아주 흥에 겨워 한껏 목소리를 높이며 기교를 부리던 그가 변곡점이 되는 장면에서 '제 3 한강교'를 부를 때는 마치 꼭꼭 씹어 밥을 먹듯 정박으로 음 하나하나를 찍어낸다.
마치 동요를 부르는 방식으로 따라 부른 이 노래도 천천히 슬픔이 끓어오르도록 감정을 고양시킨다.


그가 연기한 주인공은 어쩌면 현장에서 함께 하지 못해 미안함을 평생 안고 있는 동시대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기도 한다.
극 중 송강호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던 "미안합니다"라는 대사 속에는 이런 동시대 사람들의 무거운 부채감이 녹아 있다.


그렇기에 극 중 택시운전사의 변화를 응원하고 함께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할 수 있는 게 아니었을까 싶다.
더불어 류해진이 연기한 극 중 광주 운전기사의 대사인 "괜찮다. 왜 당신이 미안하냐, 나쁜 놈들이 미안해해야지"라는 말로 위로를 받고 싶었을 수도 있다.


장 감독의 절제된 연출과 구성이 뛰어난 영상, 달인의 경지에 이른 송강호의 생활연기가 빛을 발한 작품이다.
올여름 볼 만한 작품을 하나 꼽으라면 단연 우선 추천할 만큼 발군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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