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비추천 DVD / 블루레이

홀리데이 (LE)

울프팩 2006. 4. 16. 11:57

"88올림픽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0월의 일요일.
서울 북가좌동 주택가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 집 담장에서 지켜본 탈주범 지강헌의 최후 모습은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담배를 꼬나문 채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던 적의 가득한 눈빛, 창틀을 부여잡고 폭포처럼 쏟아내던 절규, "사랑받고 싶었다" "생명이 몇 시간 남았는 지 모르지만 따사로운 햇빛을 받고 싶다"는 등...
그리고 유리조각으로 목을 긋기 전 세상을 향해 조롱하듯 날린 섬뜩한 미소까지.

무엇보다 귓가에 선연한 것은 비지스의 팝송 '홀리데이'의 애잔한 선율이다.
지강헌은 경찰에 요구해 받은 테이프를 방안 카세트에 꽂고 한껏 볼륨을 올렸다.
그리고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따라 불렀다.
유리 조각으로 자해하고, 순간 뛰어든 경찰의 총탄을 맞은 것은 그 직후였다."

지금은 논설위원인 선배가 옛 기억을 더듬으며 쓴 글이다.
그는 당시 사회부 기자였고, 난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글만으로는 당시 현장의 분위기를 실감하기 힘들지만 TV 뉴스로 지켜본 모습은 한 편의 영화같았다.
오히려 지금도 생생한 것은 비지스의 '홀리데이'가 아니라 쨍쨍 울리던 지강헌의 쇳소리같은 음성이다.

'리베라 메' '바람의 파이터'를 만든 양윤호 감독의 '홀리데이'는 1988년에 일어났던 지강헌 사건을 토대로 만든 영화다.
실제 사건에 허구를 가미한 팩션인 이 작품은 기대를 모았지만 드라마틱한 사건을 제대로 못살렸다는 느낌이다.

오히려 대결 구도를 강조하기 위해 대입한 허구들이 리얼리티를 떨어뜨렸다는 생각이다.
'바람의 파이터'도 그렇지만 양 감독은 지나치게 극적인 요소에 집착한다.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인데, 아무래도 양 감독의 한계가 여기까지인 듯 싶다.

1.85 대 1 애너모픽 와이드 스크린을 지원하는 DVD 화질은 약간 아쉬움이 남는다.
간간히 잡티와 스크래치, 얼룩이 보이는 건 그렇다쳐도 세로줄이 나타나는 것은 심했다는 생각이다.

돌비디지털 5.1 채널을 지원하는 음향은 서라운드 효과가 그런대로 잘 살아있다.
헬기 이동음과 자동차 소리 등을 들어보면 소리의 이동성과 방향감이 좋다.

2장의 디스크로 구성된 만큼 2편의 음성해설, 삭제 장면, 제작과정 등 많은 부록이 들어있다.
다만 실제 사건에 대한 다큐멘터리 등이 들어있더라면 좋았을텐데, 전무해서 아쉽다.

<파워DVD 캡처샷>

사용자 삽입 이미지

1988년 10월8일, 서울 올림픽 폐막 6일후 이감 중이던 지강헌 등 죄수 12명은 호송버스를 탈취해 도주했다. 이들은 8박9일 동안 숨어다니며 서울로 잠입해 인질극을 벌였다.
영화에서는 지강헌을 절도 3범으로 소개했지만 실제 그는 강도, 강간 전과 13범이었다. 당시 그는 500여만원을 훔친 죄로 징역 7년, 보호감호 10년 등 총 17년을 선고받고 복역중이었다. 시인이 되는 것이 꿈이었던 그는 신춘문예에 2번이나 응모한 경력도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식빵으로 담근 막걸리를 감방 변기속에 감춰두었다가 꺼내먹는 장면. 실제로 죄수들은 감옥에서 각종 소재를 이용해 막걸리는 물론이고 케익까지 만들어 먹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화속 교도소는 익산시 폐교를 개조한 세트. 지강헌의 탈주 동기로 알려진 보호감호법은 동일 범죄를 2번 이상 되풀이해 합계 3년 이상 형을 산 자가 다시 범죄를 저지르면 옥살이가 끝난 뒤 감호 시설에 가둬놓고 교화하는 것을 말한다. 군사정권 시절 생긴 이 법은 두 번 옥살이로 악명이 높았는데 지난해 6월이 돼서야 폐지됐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지강헌을 연기한 이성재. 식스팩이 확연히 드러나는 근육질 몸매는 운동으로 만들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최민수가 연기한 교도소장은 가공인물이다. 일부러 선악구도로 몰고가기 위해 도입한 교도소장 때문에 영화의 리얼리티가 떨어졌다. 굳이 메시지를 집어넣으려는 시도가 뻔하게 엿보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화 속 첫 번째 인질은 실제 사건에서는 세 번째 인질이었다. 당시 인질들은 지강헌 일당을 '불쌍한 사람들'로 기억하고 있다. 밥 먹고 설겆이까지 해놓고 가거나 "죄송하다. 잘 살라"는 메모와 함께 돈까지 놔두고 가서 오히려 인질들의 공감을 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음성해설에서 어느 배우가 지적했듯이, 마치 80년대 '영웅본색'을 보는 듯한 장면이다. 이외에 촌스러울 정도로 얼굴이 화면 가득 차는 클로즈업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보호감호법에 항의하기 위해 지강헌이 연희동으로 전두환을 찾아간 장면, 일부 탈주범의 홍콩 밀항 시도, 초반 등장하는 철거민들 이야기는 모두 허구다. 이런 허구들이 오히려 영화를 쌈마이로 만들었다. 같은 팩션이라도 최인호의 '지구인'과 참 대비된다. 그래서 작가가 중요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들이 인질극을 벌인 서울 북가좌동 집은 사건 이후 '흉가'로 소문나 안팔리는 바람에 법무부가 사들였다. 당시 인질이었던 가족은 정중한 탈주범을 동정하고 도우려는 스톡홀름 신드롬을 보이기도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인질극을 벌인 4명의 죄수 가운데 지강헌을 제외한 2명은 권총 자살하고 강영일은 옥상에서 검거돼 대구교도소에서 아직도 복역중이다. 여현수가 연기한 강영일은 올해 나이 마흔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장면은 당시 뉴스에서 본 실제 장면과 너무 똑같다. 영화에서 이성재가 창살 너머로 내뱉는 너무도 유명한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은 실제로 지강헌이 한 말이 아니라 유일하게 살아남은 강영일이 한 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지강헌은 유리창을 깨서 목을 그었고 잇따라 뛰어든 경찰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지금도 논란이 많은데, 당시 지강헌이 틀었던 음악은 비지스의 '홀리데이'였다. 사건 현장에 있었던 선배의 기억도 그렇고, 얼마전 모 프로그램에서 당시 뉴스를 재검색해본 결과 확인이 됐다. 지강헌이 '홀리데이' 테이프를 요구하자 경찰은 스콜피온스와 비지스의 테이프를 각각 건넸고, 이 가운데 비지스 테이프를 틀었다. 영화에서는 집에 있던 LP판을 트는 걸로 나온다. 이 곡을 영화에 넣기 위해 제작진은 9,000만원의 저작권료를 비지스측에 지불했다.

'비추천 DVD / 블루레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이드웨이 (SE)  (12) 2006.05.06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6) 2006.05.04
월레스와 그로밋2-거대 토끼의 저주  (12) 2006.04.14
세인트  (5) 2006.03.22
퍼니셔  (2) 2006.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