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허진호 6

오감도

'오감도'(2009년)라는 제목은 중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다섯 감독이 그린 그림이라는 의미와 사람의 오감을 자극하는 영화라는 이중적인 뜻이다. 이 작품은 변혁, 허진호, 유영식, 민규동, 오기환 등 5명의 중견감독이 하나의 주제를 갖고 각자의 스타일로 각기 다른 이야기를 만든 옴니버스 영화다. 이들이 정한 주제는 '에로스'다. 아무래도 사랑이 인간의 감각을 총동원하는 일인 데다 사람마다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다섯 감독은 독특한 방식으로 작업을 했다. 시나리오부터 배우 섭외, 연출, 편집 등은 각 감독들이 각자의 개성대로 하고 배우들의 각 에피소드 간 교차 출연, 각 에피소드의 소재 선택 등은 모여서 토의를 거쳐 정했다. 따라서 전체 주제의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저마다 다른 개성 강한 ..

행복 (블루레이)

허진호 감독이 그린 사랑은 무조건 아름답거나 낭만적이지 않으며 숭고하지 않다. 세상의 사랑이 무조건 쉽지만 않듯, 남녀간의 얽히고 설키며 엇나가는 사랑의 감정을 꽤나 설득력있게 다뤘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감정적 리얼리티가 살아 있다. '봄날은 간다' '8월의 크리스마스' '외출' '호우시절' 등이 그랬다. 그런 점에서 '행복'(2007년)은 여러모로 안타까운 작품이다. 내용은 방탕하게 살던 청년이 간경변에 걸려 요양원에 들어가서 만난 여자와 사랑을 나누는 얘기다. 문제는 이 작품이 허진호식 로맨스의 틀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는 점이다. 다른 작품에서 보여준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애면글면 관객과 줄다리기하듯 보여주지 못했고 진부하고 통속적인 스토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다보니 예측 가능한 뻔한 뒷이야기..

봄날은 간다 (블루레이)

허진호 감독의 두 번째 작품 '봄날은 간다'(2001년)를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대사가 있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앞뒤 맥락없이 이 말 한마디만 놓고 보면 다소 낯간지러울 수 있지만 영화 속에서는 사실상 주제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대사다. 꼭 영화가 아니더라도 살면서 사랑에 설레이거나 가슴 아파한 사람들에게는 꽤나 큰 울림으로 다가올 수 있는 말이다. 영화는 한때 화사한 봄날처럼 아름답고 눈부셨던 사랑도 세월과 함께 속절없이 바래져가는 현실을 담담하게 담았다. 그 속에서 사랑에 아파하는 남자의 마음이 때로는 무겁게 때로는 아리게 다가온다. 아무래도 허 감독이 남자이다보니 남자 쪽 시선에서 사랑의 아픔을 바라 볼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만큼 유지태와 얄미운 여자 역을 제대로 해낸 ..

8월의 크리스마스 (블루레이)

이르고 늦고의 차이는 있겠지만, 죽음은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명제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죽음을 맞는 경우도 있지만, 이를 알고 준비하는 사람들도 있다.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1998년)는 죽음을 기다리는 한 남자의 평온한 일상을 그렸다. 그의 일상은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다. 친구들과 어울리고, 옛 추억을 그리워하며 아련한 사랑을 한다. 다만 죽음이 예정돼 있다는 것만 다를 뿐. 그래서 그의 일상은 더없이 소중하고 아름답다. 이 영화를 보고나면 마루에 앉아서 발톱을 깎고, 가족과 수박을 먹으며 마당에 씨를 뱉어내고 연인과 아이스크림을 나눠먹는 평범하고 소소한 우리네 일상이 한없는 무게감으로 다가 온다.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일상을 이토록 큰 의미 부여와 함께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호우시절 (블루레이)

허진호 감독의 '호우시절'(2009년)은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담은 시 같은 영화다. 갑자기 내린 비처럼 우연히 그리운 사람을 만나 사랑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내용이다. 이 작품을 보면 '그 길위로 그리움의 향기가 가득 피어난다'는 싯구가 생각난다. 둘이 걸으며 추억을 쌓았던 길을 혼자 걷는다면 남는 것은 그리움 뿐이기 때문이다. 피천득의 '인연'이란 수필도 생각난다. 차라리 몰랐더라면 좋았을 법한 일도 세상에는 많기 때문. 그런 점에서 영화는 시처럼 수필처럼 흘러간다. 다만 문학과 다른 점은 마침표를 찍지 않았다는 점이다. 훗날 둘의 미래는 관객의 상상에 맡긴채로 열린 결말로 맺었다. 그만큼 긴 호흡의 안정적 여백이 느껴진다. 전반적으로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 '외출' 등에서 보여준 별다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