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김꽃비 4

여자, 정혜

이윤기 감독의 작품은 호흡이 긴 유럽 영화에 가깝다. '멋진 하루'도 그렇지만 그의 장편 데뷔작인 '여자, 정혜'(2005년)는 더더욱 찬찬한 시선의 영상이 긴 호흡으로 펼쳐진다. 어린 시절 성폭행을 당한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 여자 정혜(김지수)의 일상을 따라가는 영화는 숏과 숏 사이를 긴 침묵이 메우고 있다. 주인공 정혜의 차분한 시선으로 풍경과 사물을 섬세하게 바라보는 영상은 그만큼 할리우드 스타일의 빠른 커트에 익숙해 있다면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드라마틱한 사건이나 화려한 볼거리도 없다.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에 불쑥 카메라를 들이댄 것 처럼 무심한 영상이 시종일관 펼쳐진다. 그만큼 세심한 표정연기가 필요해 배우들이 연기하기 힘들었을 것 같다. "연기가 아닌 것 처럼 가장하는 연기가 가장 힘들..

돼지의 왕

잔혹 스릴러를 표방한 연상호 감독의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2011년)은 여러 작품이 중첩돼 있다. 우선 일본 중학생들의 우울한 삶을 다룬 후루야 미노루의 걸작 만화 '두더지'와 권력의 속성을 날카롭게 파헤친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그리고 유하 감독의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등이 엉켜 있다. (http://wolfpack.tistory.com/entry/두더지) 어느 중학교에서 또래 집단간에 벌어진 학원 폭력의 이야기를 미스테리 스릴러처럼 다루었다. 무엇보다 탄탄하고 흡입력있는 이야기가 영화를 집중해서 보게 만든다. 특히 약자를 괴롭히는 자들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 일으킬 만큼 캐릭터 하나하나에 감정이입이 잘 돼 있고 메시지 전달도 설득력있다. 그만큼 양익준, 오정세, 김혜나, 김꽃비 등..

똥파리 (DVD)

양준익 감독의 '똥파리'(2009년)는 참으로 강렬한 영화다. 김기덕 감독의 '악어' '섬' '나쁜 남자' 이후 이처럼 폭력이 일상화된 삶을 냉혹하게 묘사한 영화는 처음이다. 그려면서도 한편으로는 따뜻한 영화다. 어려서부터 폭력에 노출된 가정에서 자란 주인공이 결국은 자신도 폭력의 세계에 발을 담그지만 그가 못내 그리워하고 돌아가려고 하는 곳은 결국 따뜻한 가정이다. 그런 점에서 참으로 사람의 냄새가 나는 진정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비록 날 것 그대로의 거친 욕설과 폭력으로 점철된 장면들이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그 또한 우리네 삶의 한 단면이다. 양 감독은 처음 찍은 장편 영화인 이 작품에서 감독, 각본, 주연까지 1인 다역을 해냈다. 그런데도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고 제 몫 이상을 훌륭하게 해낸 ..

똥파리

볕이 따가울 수록 그늘은 시원하다. 일이 힘들수록 휴식이 달콤하고 꿀맛 같은 이치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보며 나를 대신해 짐진 자의 고통에 감사하듯, 세상의 어두운 모습을 보며 그렇지 않은 삶에 감사하는 겸허를 배우게 된다. 양익준 감독의 '똥파리'는 그런 영화다. 일수 돈이나 받아내며 밑바닥 인생을 사는 주인공 상훈의 삶은 조악하기 그지없다. 거기에 불우한 환경에 대한 원망이 가득해 아버지를 때리고 시종일관 입에 욕을 달고 사는 똥파리 같은 존재다. 도대체 삶에 낙이 없을 것 같은 상훈도 마찬가지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여고생 연희를 만나며 희망을 갖는다. 그리고 다르게 살려는 노력을 한다. 그 결과는 차치하고라도, 조악한 삶 자체가 세상의 또다른 면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일깨워준다. 그 속에서 그..

영화 2009.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