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박성웅 5

무뢰한 (블루레이)

오승욱 감독의 '무뢰한'(2014년)은 하드보일드 멜로를 표방한 영화다. 도대체 하드보일드 멜로가 무엇일까. 이전 작품들에서도 사례를 들어보지 못한 이 장르에 대해 제작진은 "하드보일드 안에 들어 있는 멜로"라고 설명했다. 쉽게 말해 주먹질과 피가 난무하는 거친 남자들의 세계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멜로 이야기라는 뜻이다. 풀어보면 새로울 것도 없고 예전 작품들에서 숱하게 접한 이야기들인데 이를 굳이 새로운 장르인양 포장한 이유를 모르겠다. 그만큼 이전 작품들과 차별화했다는 뜻일까. 영화를 보면 그렇지도 않다. 내용은 형사가 살인범을 쫓으면서 살인범의 애인과 뜻하지 않게 연정을 품게 되는 이야기다. 이야기는 예상대로 흘러가서 특별한 반전이 보이지 않는다. 결말까지 이르는 과정에 등장인물들의 내밀한 감정 변화..

반칙왕 (블루레이)

1970년대 흑백 TV 시절 최고의 스포츠 중계방송은 단연 프로레슬링이었다. 레슬링이 있는 날이면 집으로 뛰어들어와 책가방을 던져두고 TV 앞으로 달려갔던 기억이 난다. 김일, 여건부, 천규덕 등은 당대 최고의 영웅이었고 상대적으로 일본의 이노키 선수는 최고의 악당이었다. 레슬링 인기가 얼마나 높았던지, 일본에서 만든 '타이거마스크'라는 TV 만화영화도 들여와 방송했다. 김지운 감독의 '반칙왕'(2000년)은 과거 레슬링에 대한 향수가 어린 작품이다. 특이하게도 70년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으나 지금은 쇠락한 프로레슬링을 통해 현대인들의 꿈과 삶의 희망을 이야기한다. 그만큼 웃음과 페이소스가 공존하는 작품이다. 그다지 유능하지 못한 은행원(송강호)이 어느 날 우연히 레슬링 도장을 발견하고 어린 시절 우상..

신세계 (블루레이)

박훈정 감독의 '신세계'(2012년)는 깔끔한 영화다. 장르에 충실한 느와르 영화답게 군더더기 하나 없이 비정한 사나이들의 혈투를 피비린내 가득한 영상으로 묘사했다. 내용은 스파이를 통해 범죄 조직을 장악하려는 경찰과 이에 맞선 조직 폭력배들의 이야기다. 신분을 숨긴 채 잠입한 경찰 스파이라는 설정만 놓고 보면 신선한 소재는 아니다. 홍콩 영화 '무간도' 시리즈를 비롯해 할리우드 영화들에도 여러 번 등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소재가 계속 되풀이 되는 이유는 스파이물 특유의 긴장과 두뇌 플레이가 충분히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도 마찬가지. 내부 스파이를 색출하려는 조폭들과 경찰들의 숨막히는 암투가 빚어내는 긴장감이 일품이다. 그만큼 '부당거래' '악마를 보았다' 등 화제작 작가 출신 답게 박..

신세계

박훈정 감독의 영화 '신세계'는 처음부터 끝까지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를 들고 있는 느낌이다. 그만큼 영화는 시종일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만든다. 내용은 홍콩영화 '무간도'처럼 폭력 조직의 중간 보스로 파고 든 경찰이 범죄조직을 와해시키는 이야기. 설정부터 그러니, 정체가 드러날까 봐 가슴을 조이는 경찰만큼이나 보는 사람도 숨이 가쁘다. 긴장감 넘치는 드라마로선 최고지만, 칼 끝 같은 긴장 속에 한 치의 여유도 없다는 점이 문제다. 각종 의심과 암투로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견제하느라 뻣뻣하게 굳어있는 등장인물들의 스트레스가 보는 사람에게도 고스란히 전이된다. 그만큼 일말의 휴식같은 러브라인이나 웃음 코드의 부재가 아쉽다. 대신 그 자리를 권력을 노린 조폭들의 쌍욕과 과도한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한..

영화 2013.02.23

여자, 정혜

이윤기 감독의 작품은 호흡이 긴 유럽 영화에 가깝다. '멋진 하루'도 그렇지만 그의 장편 데뷔작인 '여자, 정혜'(2005년)는 더더욱 찬찬한 시선의 영상이 긴 호흡으로 펼쳐진다. 어린 시절 성폭행을 당한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 여자 정혜(김지수)의 일상을 따라가는 영화는 숏과 숏 사이를 긴 침묵이 메우고 있다. 주인공 정혜의 차분한 시선으로 풍경과 사물을 섬세하게 바라보는 영상은 그만큼 할리우드 스타일의 빠른 커트에 익숙해 있다면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드라마틱한 사건이나 화려한 볼거리도 없다.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에 불쑥 카메라를 들이댄 것 처럼 무심한 영상이 시종일관 펼쳐진다. 그만큼 세심한 표정연기가 필요해 배우들이 연기하기 힘들었을 것 같다. "연기가 아닌 것 처럼 가장하는 연기가 가장 힘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