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유지태 8

올드보이(블루레이)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에 빛나는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는 2003년 나온 영화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음악, 연출, 연기, 영상 등 모든 것이 너무나도 훌륭했던 작품이다. 특히 설정이 기가 막혔다. 15년을 갇혀있다가 풀려난 오대수(최민식)의 복수극인 줄 알았으나 실상은 이우진(유지태)이 그린 더 큰 복수극이라는, 상자를 덮는 또 다른 상자 같은 설정부터 막판 충격적인 반전까지 모든 것이 완벽한 내러티브를 갖춘 작품이다. 원작은 일본의 츠치야 가론이 그린 만화이지만 주인공이 오랜 시간 갇혀있다가 풀려난 것 외에 나머지는 새로운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다르다. 박 감독은 이 작품에 신화적 요소를 많이 가미했다. 금기시된 관계 때문에 빚어지는 비극과 이로 인한 파국은 고대 비극적..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블루레이)

2004년 홍상수 감독의 영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언론 시사회 때 참석했던 기억이 난다. 그의 영화가 언제나 그렇듯 느닷없이 끝나는 결말에, 뒷줄에서 황당하다는 듯 웃음이 터졌다. 황당함은 기자간담회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도 계속 됐다. 여자가 남자의 미래인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홍 감독 왈, "제목은 내용과 상관없다. 어느 날 이 문장을 봤는데 끌려서 붙였다. 제목은 문장일 뿐"이라고 답했다. 그래서 이것은 좀 아니다, 무책임하다는 생각에 혹독하게 기사로 깠다. 한편으로는, 이전에 본 서너 편의 작품과 동어반복처럼 되풀이 되는 그만의 스타일이 좀 게을러 보이는 측면도 있었다. 그때는 그런 점들이 홍 감독 영화의 단점으로 보였는데, 시간이 지나서 여러 편 보다보니 그의 개성으로 부각된다. 등장..

원더풀 데이즈 - 감독판 (블루레이)

김문생 감독의 애니메이션 '원더풀 데이즈'(Wonderful Days, 2003년)는 우리 애니메이션계에서 독특한 시도를 한 작품이다. 우선 인물들을 2차원 셀 애니메이션으로 그린 뒤 실사 촬영한 배경을 컴퓨터 그래픽으로 합성해 하나의 영상으로 만드는 3중처리 과정을 거쳤다. 그 바람에 일부 영상들은 실사 영화처럼 사실적이고 정교한 그림을 보여준다. 특히 미니어처를 제작해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한 미르 풍경 등은 다층 레이어를 통해 영상의 깊이감을 느낄 수 있다. 문제는 부실한 이야기다. 미래의 에코반이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세력과 이를 벗어나려는 세력과의 싸움을 그린 이야기가 그다지 설득력이 없고, 흡입력 또한 떨어진다. 모두에게 푸른 하늘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부분은 영화 '토탈리콜'..

봄날은 간다 (블루레이)

허진호 감독의 두 번째 작품 '봄날은 간다'(2001년)를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대사가 있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앞뒤 맥락없이 이 말 한마디만 놓고 보면 다소 낯간지러울 수 있지만 영화 속에서는 사실상 주제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대사다. 꼭 영화가 아니더라도 살면서 사랑에 설레이거나 가슴 아파한 사람들에게는 꽤나 큰 울림으로 다가올 수 있는 말이다. 영화는 한때 화사한 봄날처럼 아름답고 눈부셨던 사랑도 세월과 함께 속절없이 바래져가는 현실을 담담하게 담았다. 그 속에서 사랑에 아파하는 남자의 마음이 때로는 무겁게 때로는 아리게 다가온다. 아무래도 허 감독이 남자이다보니 남자 쪽 시선에서 사랑의 아픔을 바라 볼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만큼 유지태와 얄미운 여자 역을 제대로 해낸 ..

비밀애

형제가 한 여인에게 집착하는 금기시된 사랑은 사람들의 관음증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이병헌 이미연이 주연한 '중독', 나탈리 포트만과 토비 맥과이어가 나온 '브라더스' 등 여러 영화들이 비슷한 이야기를 다뤘다. 그런 점에서 류훈 감독의 '비밀애'는 마치 데자부처럼 신선하지 않다. 사고를 당한 형을 대신해 동생이 형수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는 배우들이 다르다는 점 외에 어디서 본 듯한 기시감을 불러 일으킨다. 여기에 반칙까지 했다. 형제가 똑같이 생긴 쌍둥이여서 여인을 헷갈리게 한 점이나 도덕적 비난을 피하기 위한 인위적 결말 등은 설득력을 떨어뜨린다. 특히 그 과정에서 설명이 부족한 장면도 일부 있어 보는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결국 눈길을 끄는 건 윤진서와 유지태가 벌이는 육욕 행각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