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일본 55

철도원(블루레이)

후루하타 야스오 감독의 '철도원'(鐵道員: ぽっぽや, 1999년)은 눈발이 펄펄 날리는 풍경만으로도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작품이다. 그 속에 검은 제복을 입은 중년의 남자가 플랫폼에서 오롯이 눈을 맞으며 서 있는 영상은 한 폭의 시다. 그만큼 이 작품은 영상으로 모든 것을 말하는 훌륭한 작품이다. 그렇다고 영상이 전부인 작품은 아니다. 이야기나 서정적인 연출, 배우들의 묵직한 연기 또한 영상 못지않게 훌륭하다. 아사다 지로의 동명 단편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일본 단카이 세대의 아픔과 회한을 그리고 있다. 일본 단카이 세대는 1960년대 이념적 갈등의 시기인 전공투 시절을 거쳐 경제 발전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다. 가족과 일터를 위해 개인을 버려야 했던 그들은 일과 직장, 가족이 전부였던 세대다..

공각기동대(블루레이)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저패니메이션 '공각기동대'(Ghost In The Shell, 1995년)를 처음 봤을 때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전뇌(電腦), 인형사 등 단어부터 생소했고 주인공인 쿠사나기 모토코의 정체도 쉽게 파악이 되지 않았다. 로봇인지 사람인지 헷갈리는 상황에서 마지막 결말을 보면 유령 같다는 느낌마저 든다. 그만큼 모호한 존재가 등장하는 이 작품은 다분히 실존주의 철학의 냄새마저 강하게 풍기는 작품이었다. 너는 누구인가, 실존주의적인 질문을 던지다 이 작품이 등장한 1995년은 국내에 인터넷 조차도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1994년 국내 최초의 민간 인터넷 업체인 아이네트가 등장해서 이메일 계정을 판매했지만 사람들은 무엇에 쓰는 것인지 몰랐다. 여전히 모뎀을 이용해 PC통신을..

고스트 오브 쓰시마(PS4)

오랜만에 칭찬할 만한 게임이 나왔다. 콘솔 게임기인 플레이스테이션 4(PS4)용으로 출시된 '고스트 오브 쓰시마'(Ghost of Tsushima)다. 써커펀치에서 만든 이 게임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일본을 배경으로 한다. 1274년 몽고군이 일본 정벌을 위해 대마도, 즉 쓰시마에 상륙하면서 벌어지는 싸움을 다뤘다. 역사적으로 당시 몽고군의 전력이 우세했지만 때마침 불어닥친 태풍 때문에 몽고군 함대는 일본 본토에 상륙하지 못하고 수장됐다. 그때 일을 기려서 일본은 그 태풍을 신의 바람, 즉 신풍(神風)이라는 뜻의 카미카제라고 부른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 함대를 향해 비행기 충돌을 감행한 일본군의 자살특공대인 카미카제 특공대 이름이 여기서 나왔다. 게임은 쓰시마에 상륙한 몽고군에 맞서는 사무라이 진..

메모장 2020.08.16

세 번째 살인(블루레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세 번째 살인'(三度目の殺人, 2017년)은 특이한 영화다. 고용주를 죽여 체포된 중년의 공장 노동자 미스미(야쿠쇼 코지)가 형량을 낮추기 위해 사건을 조사하는 변호사들에게 끊임없이 말을 바꾸며 사건을 오리무중에 빠트린다. 마치 일부러 죽으려고 작정한 것처럼 미스미는 유리한 증거나 증언이 나오면 이를 뒤집는다. 심지어 살해된 사장의 딸 사키에(히로세 스즈)가 결정적인 증언을 하겠다며 나서지만 미스미는 이 조차도 거부한다. 이쯤 되면 변호사 시게모리(후쿠야마 마사하루) 뿐만 아니라 관객들도 헷갈린다. 도대체 사건의 진실은 무엇인가. 영화 속에 진실은 없고 팩트, 즉 사실만 있다. 팩트는 미스미가 사장을 죽였다는 것. 사실은 현상을 보여줄 뿐이다. 현상 뒤에 숨은 의미를 알려면 진..

한여름의 판타지아(블루레이)

장건재 감독의 '한여름의 판타지아'(2014년)는 독특한 구성을 갖고 있는 영화다. 영화는 크게 2부로 구분된다. 1부는 영화 제작을 위해 일본 나라현의 고조시를 찾은 감독 태훈(임형국)이 이야깃거리를 얻기 위해 현지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하는 내용이다. 태훈은 조감독이자 통역을 해줄 혜정(김새벽)과 함께 고조시 관광담당 공무원인 유스케(이와세 료)의 안내로 동네 사람들을 만난다. 태훈이 끌린 이야기는 오래전 오사카에서 일할 때 한국 여인을 만나 잠시 연애를 했던 겐지(강수안)의 이야기와 배우를 꿈꿨던 유스케가 어떤 여인을 만났으나 정작 이뤄지지 않았던 사랑 이야기였다. 두 사람의 이야기에서 태훈이 모티프를 얻는 것으로 1부는 마무리된다. 2부에서는 내용이 완전히 바뀌어 고조시를 홀로 찾은 여성 혜정(김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