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임권택 7

서편제(블루레이)

우리 영화 사상 최초로 100만 관객 기록을 세운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1993년)는 안타깝고 처절한 이야기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영화다. 이청준의 연작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이 작품은 소리에 미쳐 세상을 떠도는 소리꾼 유봉(김명곤)과 양딸 송화(오정해), 아들 동호(김규철)의 삶이 얽힌 가슴 아픈 이야기다. 여기저기 떠돌며 소리로 먹고사는 유봉은 북을 치는 아들과 소리를 하는 딸의 실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혹독하게 가르친다. 이 과정에서 아들 동호는 소리에 미친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가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해 죽은 사실을 뒤늦게 알고 아버지를 원망하며 뛰쳐나간다. 그렇게 아들을 잃은 유봉은 나이 들어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게 되면서 딸에게 더욱 집착한다. 무엇보다 완벽한 소리를 만들기 위해 딸..

태백산맥(블루레이)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 황석영의 '장길산', 나관중의 '삼국지연의' 같은 대하소설은 영화로 만들기 힘든 작품들이다. 두어 시간 남짓한 상영시간에 압축해 소화하기에는 내용이 너무 방대하기 때문이다. 굳이 만든다면 '반지의 제왕'을 만든 피터 잭슨 감독처럼 여러 번 끊어 만들 수밖에 없을 듯싶다. 삼국지도 영화의 경우 재미있는 부분만 끊어서 만든 경우가 많다. 그렇지 않으면 박경리의 '토지'처럼 긴 이야기를 소화할 수 있는 드라마로 만드는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조정래의 10권짜리 대하소설을 영상으로 옮긴 임권택 감독의 '태백산맥'(1994년)은 용감하면서 무모한 도전이다. 아쉬움 큰 영화 2시간 44분의 남과 북이 이념 대립으로 갈리게 된 민족 비극의 배경을 모두 녹여 넣기에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짝코 (블루레이)

임권택 감독은 가족에 얽힌 아픈 과거사를 갖고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에 유학 갔던 삼촌이 사회주의자가 되면서 아버지 등이 좌익 활동에 연루돼 곤욕을 치른 것. 특히 아버지가 빨치산이 돼 집을 나간 뒤로 거의 날마다 경찰들이 들이닥쳐 집 뒤짐을 했다고 한다. 견디다 못한 임 감독은 중학교 3학년 때 집을 나와 부산에서 군화를 떼어다 팔면서 살았다. 그때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이 영화사업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임 감독도 영화계에 발을 디뎠다. 그런 만큼 '짝코'(1980년)는 임 감독 입장에서 쉽게 만들 수 있는 영화가 아니었다. 이 영화는 망실공비(亡失共匪)를 다룬 작품이다. 망실공비란 말 그대로 사망이나 체포가 확인되지 않아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공비를 말한다. 1950년대 공비 토벌전에서 뛰어난 ..

소중한 날의 꿈 (블루레이)

무려 11년. 안해준, 한혜진 감독의 애니메이션 '소중한 날의 꿈'(2011년)은 제작에 11년이 걸렸다. 일일이 이 땅 구석구석을 발로 찾아 다니며 하나 하나 사모은 소품을 꼼꼼히 작품 속에서 표현하기 위해 걸린 시간이다. 그만큼 정겨운 손그림으로 살린 이 작품의 디테일은 발군이다. 박치기왕 김일이 활약하던 프로레슬링 시절의 네 발 달린 흑백TV, 가게 천장에 매달려 있던 파리 끈끈이, 그리고 신작로에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던 삼륜차처럼 1970년대 시대상이 온전하게 남아 있다. 어찌나 사실적으로 묘사됐는 지 보는 내내 오래된 사진첩을 넘기는 것 같았다. 한마디로 이 작품은 꼼꼼하게 재현한 디테일의 승리다. 비단 소품과 풍경만 그런게 아니다. 작품 곳곳에 임희춘 배철수 차범근 차인태 손석희 임권택 정주영..

안개마을

이문열은 후기 작품들 때문에 극단적 보수주의 작가로 욕을 먹지만 그가 초창기에 내놓은 작품들은 상당히 훌륭하다. 특히 '사과와 다섯병정' '금시조' '칼레파 타 칼라' 같은 단편 소설들이 아주 빼어나다. 마당문고에서 나온 '사과와 다섯병정'이라는 이문열 단편집에 실린 '익명의 섬'도 마찬가지. 이 소설은 하나의 성씨로 이뤄져 마을 사람들이 모두 집안이다 보니 서로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 수 밖에 없는 곳에서 익명의 존재인 떠돌이 부랑자가 성의 탈출구가 돼 준다는 내용이다. 정치 사회적으로 억눌린 사람들이 성의 일탈을 통해 도덕적 분출구를 찾는 내용을 다룬 이 소설을 보면 과연 그가 보수주의자가 맞는 지 의아할 정도. 하지만 변화를 추구하기 보다 어떤 현상을 관찰하는데만 그치는 방관자적 자세를 견지하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