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조성하 5

용의자

가끔 보면 본말이 전도된 영화가 있다. 스토리, 연기 등 기본기에 충실해야 하는데 요란한 컴퓨터그래픽이나 눈요기꺼리를 부각해 부족한 기본기를 가리는 식이다. 원신연 감독의 '용의자'(2013년)가 그런 영화다. 이 영화의 액션은 아주 화려하다. 러시아의 시스테마 무술을 이용한 북한 특수부대원과 이를 추격하는 정보기관 요원들의 싸움은 물론이고 자동차 추격전에 총격전까지, 한국에서 일어나리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할리우드 액션이 쏟아진다. 특히 계단으로 이뤄진 언덕길을 뒤로 달려내려오는 자동차 추격전은 보는 이를 아찔하게 만든다. 어느 순간 차가 허공에서 한바퀴 공중제비를 돌아 떨어지는 장면은 어떻게 찍었을까 싶을 정도로 대단하다. 하지만 정신없이 액션을 몰아치는 것은 좋은데,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영화 2013.12.28

파수꾼 (블루레이)

윤성현 감독이 호평 속에 입문한 데비작 '파수꾼'(2011년)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을 연상케 한다. 대본을 직접 쓴 감독 자신도 이 소설을 좋아해서 제목을 따왔다고 밝혔지만 한창 예민한 사춘기 청소년의 불안과 방황을 밀도있게 그린 점이 닮았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미성숙한 인간은 어떤 이유를 위해 고귀하게 죽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다'는 심리학자 빌헬름 스테켈의 말을 인용한다. 윤 감독이 이 작품에서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소년들 사이에 미묘하게 벌어지는 갈등의 이유를 함축하고 있는 말이기도 하다. 한 때는 친했던 세 아이들이 드러내지 않은 내면 때문에 갈등을 겪으며 멀어지는 내용이다. 치기어린 청소년기의 자존심일 수도 있고, 반항일 수도 있지만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또래 ..

화차

변영주 감독의 영화 '화차'(2012년)는 김민희를 새로 발견할 수 있는 영화다.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 정체불명의 여인을 연기한 김민희는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면서도 미스테리한 분위기를 풍기는 연기로 원작 소설에서 걸어나온 듯한 캐릭터를 선보였다. 그만큼 김민희의 연기는 자연스러웠고, 많이 나오지 않는데도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이 있었다. 퇴물 형사로 나온 조성하를 비롯해 간호사 한나 역의 김별 등 주인공을 받친 배우들의 연기도 자연스럽다. 원래 이 작품은 일본의 인기 작가인 미야베 미유키가 1992년 출간한 동명의 미스테리 소설이 원작이다. 제목인 화차는 나쁜 짓을 저지른 사람의 영혼을 태운 채 지옥으로 달려간다는 일본 전설 속 불마차로, 올라타면 내릴 수 없단다. 경제 위기에 몰린 여인이 타인의 삶을 훔..

영화 2012.03.18

황해 (블루레이)

우리도 다민족 사회가 된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주변에서 동남아나 조선족들을 심심찮게 본다. 과거 우리가 중동과 독일로 노동력 품팔이를 나갔던 것처럼 이제는 그들이 우리에게 품팔이를 오는 것이다. 이들은 바로 글로벌 시대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글로벌화는 자본의 이동만큼 노동의 이동이 자유롭지 못하다. 투기 자본은 세계 곳곳을 누비며 돈벌이가 될 만한 일에 자유롭게 투자할 수 있지만 노동력은 그다지 자유롭게 이동해 여기저기서 돈을 벌 수 없다. 어디나 자국의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 노동시장을 개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이동이 자유롭지 못한 노동력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 저임금을 마다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저임금은 생계를 옥죄며 사회 문제를 야기한다. 영화 '아저씨' '의형제' '황..

황해

나홍진 감독의 '황해'는 길고도 비릿하다. 우선 상영 시간이 2시간 36분에 이를 만큼 길다. 다양한 등장인물이 나와서 복잡하게 얽힌 인간사를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중국 연변에서 거액의 빚을 지고 힘들게 살아가는 구남(하정우)과 살인도 마다않고 개백정처럼 험한 일을 하며 살아가는 면정학(김윤석), 욕심에 눈이 멀어 살인을 사주한 태원(조성하) 등 주요 배역들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의 꼬리를 물고 들어간다. 일면 복잡해 보이기도 하지만 정교하게 맞물린 이야기는 감독의 공들인 흔적이 보인다. 단, 실타래처럼 얽힌 이야기의 맥을 놓치지 않으려면 긴 상영 시긴 내내 절대 졸면 안된다. 앞 부분 구남의 사연이 사족처럼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상영 시간이 지루하지는 않다. 세 사람이 서로의 목줄을 노리며 벌이는 숨가..

영화 2010.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