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프로레슬링 4

반칙왕 (블루레이)

1970년대 흑백 TV 시절 최고의 스포츠 중계방송은 단연 프로레슬링이었다. 레슬링이 있는 날이면 집으로 뛰어들어와 책가방을 던져두고 TV 앞으로 달려갔던 기억이 난다. 김일, 여건부, 천규덕 등은 당대 최고의 영웅이었고 상대적으로 일본의 이노키 선수는 최고의 악당이었다. 레슬링 인기가 얼마나 높았던지, 일본에서 만든 '타이거마스크'라는 TV 만화영화도 들여와 방송했다. 김지운 감독의 '반칙왕'(2000년)은 과거 레슬링에 대한 향수가 어린 작품이다. 특이하게도 70년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으나 지금은 쇠락한 프로레슬링을 통해 현대인들의 꿈과 삶의 희망을 이야기한다. 그만큼 웃음과 페이소스가 공존하는 작품이다. 그다지 유능하지 못한 은행원(송강호)이 어느 날 우연히 레슬링 도장을 발견하고 어린 시절 우상..

소중한 날의 꿈 (블루레이)

무려 11년. 안해준, 한혜진 감독의 애니메이션 '소중한 날의 꿈'(2011년)은 제작에 11년이 걸렸다. 일일이 이 땅 구석구석을 발로 찾아 다니며 하나 하나 사모은 소품을 꼼꼼히 작품 속에서 표현하기 위해 걸린 시간이다. 그만큼 정겨운 손그림으로 살린 이 작품의 디테일은 발군이다. 박치기왕 김일이 활약하던 프로레슬링 시절의 네 발 달린 흑백TV, 가게 천장에 매달려 있던 파리 끈끈이, 그리고 신작로에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던 삼륜차처럼 1970년대 시대상이 온전하게 남아 있다. 어찌나 사실적으로 묘사됐는 지 보는 내내 오래된 사진첩을 넘기는 것 같았다. 한마디로 이 작품은 꼼꼼하게 재현한 디테일의 승리다. 비단 소품과 풍경만 그런게 아니다. 작품 곳곳에 임희춘 배철수 차범근 차인태 손석희 임권택 정주영..

더 레슬러

20년 동안 레슬링을 해 온 사람에게는 사각의 링이 천국이요 무덤이다. 오로지 할 줄 아는게 레슬링 밖에 없으니, 링 위에서는 스타이지만 링 밖에서는 대접을 받지 못해 결국 링을 벗어날 수 없다. 어디 프로레슬러 뿐이겠는가. 인생이 대부분 그러하다. 싫든 좋든 20년 동안 몸 담았던 일을 떠나서 하루 아침에 다른 일을 잘 하기란 쉽지 않다. 결국 사람들은 모두 링 위에 서있는 레슬러다. 그런 점에서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더 레슬러'(The Wrestler, 2008년)는 중년의 인생들을 위한 가슴아픈 송가이다. 내용은 왕년에 스타였으나 지금은 한 물간 전설의 프로레슬러 랜디(미키 루크)가 심장 수술을 받고도 링에 올라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다. 죽을 것을 알면서도 그가 링에 오르는 이유는 단순히 먹고 ..

역도산

송해성 감독의 '역도산'(2004년)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 영화다. 주인공 역도산(설경구)이 프로레슬링계의 거목이고, 감독은 전작 '파이란'으로 진한 감동을 주었던 사람이기에 기대가 컸으나 결과는 의외였다. 이유는 감독이 바라본 역도산과 관객이 기대한 역도산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감독은 절대 강자의 고독과 외로움 등 역도산이라는 인간의 내면을 파고들었고, 관객들은 도대체 역도산이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었는지 궁금해하며 그의 외면을 바라봤다. 감독은 DVD의 음성해설을 통해 진정한 작품의 가치를 몰라준다며 안타까워했지만 관객들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1970년대 흑백 TV를 보고 자란 세대에게 프로레슬링은 전 국민의 오락거리였다. 당연히 박치기왕 김일, 쌕쌕이 여건부와 장영철, 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