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볼 만한 DVD / 블루레이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울프팩 2005. 6. 26. 23:47

홍상수 감독의 이름을 알린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년)은 찌는듯한 한여름 날씨처럼 권태롭고 답답한 소시민의 일상을 다룬 수작이다.
유명하지 못한 소설가 효섭(김의성), 그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유부녀 보경(이응경), 그런 효섭을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민재(조은숙), 묵묵히 민재를 짝사랑하는 민석(양민수) 등 등장인물들은 일과 사랑 어느 것 하나 쉽게 풀지 못하고 힘든 나날을 보낸다.

영화전문기자 오동진은 이 영화를 가리켜 1990년대 들어와 꿈을 잃어버린 1980년대에 20대였던 세대를 다룬 작품이라고 해석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영화를 보면 정태춘의 노래 '92년 장마, 종로에서'라는 노래가 생각난다.

'92년 장마, 종로에서'는 꿈을 접은 1980년대 학번들을 다룬 노래다.
정태춘은 노래 속에서 "비에 젖은 이 거리 위로 사람들이 그저 흘러간다. 흐르는 것이 어디 사람뿐이냐. 우리들의 한 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간다"고 노래했다.

사람들은 돼지가 우물에 빠졌다는 제목을 보고 우물가로 달려와 들여다본다.
그러나 우물 속 돼지는 간데없고 자신들의 모습만 보인다.

이 영화는 바로 그게 매력이다.
심드렁하고 소소한 일상은 결국 영화가 아닌 관객의 이야기다.

1.85 대 1 애너모픽 와이드 스크린을 지원하는 DVD 타이틀은 차마 말을 꺼내기 민망할 정도로 화질이 좋지 않다.
각종 잡티와 스크래치는 물론이고 영상이 위, 아래로 흔들리며 심지어 초반에 포커스가 안 맞은 것처럼 흐릿하다.

음향도 단순한 돌비디지털 모노를 지원한다.
대사를 제대로 알아들으려면 한글 자막을 켜야 한다.

<DVD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무명 소설가 효섭(김의성)과 사랑하는 사이인 유부녀 보경(이응경).
민재(조은숙)는 보경을 사랑하는 효섭을 맹목적으로 좋아한다. 조은숙은 이 작품으로 제17회 청룡영화제 여우조연상과 제20회 황금촬영상 신인연기상을 받았다.
DVD로 다시 보다 보니 송강호가 효섭의 친구로 잠깐 등장한다.
이 영화의 특징은 스쳐 지나갈 듯한 일상 속 이야기를 심드렁하게 풀어내는 것. 이런 점은 이후 홍 감독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효섭은 생일이라고 케이크를 사들고 온 민재 때문에 보경과 밀회가 깨지자 민재를 때리며 욕한다. "넌 똥이고, 넌 개야." 이 장면에는 성공하지 못한 인텔리겐차의 알량한 자의식과 못 배운 사람들에 대한 우월의식이 은근히 표출된다. 어찌 보면 그런 점들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학력콤플렉스를 반대로 비꼰 조롱일 수 있다.
이 영화에는 우리가 잃어버린 기억들이 많이 나온다. "신호등 위에 비둘기 한 마리, 건너 빌딩의 웬디스 햄버거 간판을 읽고 있지"라는 정태춘의 '92년 장마, 종로에서' 노랫말에 등장하는 웬디스 햄버거도 지금은 사라졌다. 이 장면은 교대 앞 웬디스 햄버거에서 촬영.
피가 됐든, 섹스가 됐든 홍상수 영화는 충격적인 반전을 하나씩 던진다.
그렇게 사람들의 기대를 올려놓고 영화는 심드렁하게 느닷없이 끝난다. 마치 사람들의 일기장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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