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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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지나가고(블루레이)

울프팩 2023. 2. 4. 15:52

고레에다 히로카즈(是枝裕和) 감독의 영화는 잔잔한 일상을 통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태풍이 지나가고'(海よりもまだ深く, 2016년)도 그런 영화다.

 

유명 작가를 꿈꾸며 사립 탐정사무소에서 일하는 료타(아베 히로시 阿部寛)가 태풍이 닥친 날 어머니(키키 키린 樹木希林)의 집에서 헤어진 아내(마키 요코 真木よう子), 아들과 함께 보내며 일어나는 일상을 다뤘다.

료타는 한때 촉망받는 작가였지만 도박으로 돈을 날리면서 결국 아내와 이혼하고 탐정 일을 하는 친구(릴리 프랭키 Lily Franky) 사무소에서 보조로 근근이 먹고사는 처지다.

 

마침 어머니의 집에 들렀다가 태풍을 만나면서 료타는 무엇이 잘못됐는지 되짚어 보게 된다.

이 작품에는 경제적으로 무능한 남자들이 등장한다.

 

주인공 료타는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한 뒤 재능을 썩히며 탐정 사무소에서 변변치 못한 일로 먹고 산다.

그를 보조로 고용한 친구도 이중 계약으로 돈을 우려내는 등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인물이다.

 

어찌 보면 료타를 비롯해 영화 속 남성들은 철이 덜 든 어른이면서 의지박약이기도 하다.

그렇다 보니 부모나 형제, 아내에게 짐이 될 수밖에 없다.

 

그에 비해 영화 속 여성들은 어른스럽다.

어머니나 누이는 넉넉하지 않아도 제 앞가림을 하며 료타를 걱정하고 품으려고 한다.

 

전 아내는 료타를 받아들일 생각은 없지만 측은하게 생각한다.

이들의 대비되는 모습을 통해 히로카즈 감독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인생을 보여준다.

 

가족도 마찬가지.

내 뜻대로 인생을 살아주는 가족은 없고 언제나 예측불가다.

 

그런 점에서 가족은 느닷없이 들이닥쳐 모든 것을 휘젓고 지나가는 태풍 같은 존재일 수 있다.

그렇다고 가족을 버릴 수는 없다.

 

그 또한 운명처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래도 히로카즈 감독은 포기하지 않고 밤새 태풍이 지나간 뒤 길거리에 뒹구는 우산을 보여주며 새 출발을 이야기한다.

 

과거의 잘못은 망가진 우산처럼 버리고 새로운 출발을 해보자는 의미다.

그런 점에서 새삼 히로카즈 감독의 연출력에 탄복했다.

 

그는 잔잔하며 평온한 이야기 속에 가족이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큰 울림을 담았다.

물론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다.

 

'어느 가족' '바닷마을 다이어리'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걸어도 걸어도' 등에서 편안한 연기를 보여준 키키 키린은 이 작품에서 늘 근심하면서도 넉넉한 마음으로 품으려고 애쓰는 어머니의 모습을 훌륭하게 연기했다.

고인이 된 그의 자연스러운 어머니 연기를 보면 일본의 김혜자라는 생각이 든다.

 

아베 히로시도 가족들에게 걱정을 끼치며 불안한 삶을 사는 주인공 료타를 잘 소화했다.

여기에 음악도 좋았다.

 

중간에 등장하는 휘파람 멜로디도 인상적이고 등려군이 부른 '이별의 예감'이 영화와 잘 어울렸다.

또 하나레구미(ハナレグミ)가 부른 주제가 '심호흡'(Shin Kokyu)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1080p 풀 HD의 1.85 대 1 화면비를 지원하는 블루레이 타이틀은 평범한 화질이다.

일본 영화 특유의 뿌연 영상과 함께 샤프니스가 그렇게 높지 않다.

 

다만 클로즈업은 명료하고 디테일이 좋다.

DTS HD MA 5.1 채널을 지원하는 음향은 적당한 서라운드 효과를 들려준다.

 

채널 분리가 잘 돼서 각종 생활소음이 리어 채널 등 여러 방향에서 흘러나온다.

부록은 없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2018년 사망한 키키 키린이 어머니 요시코, '카모메 식당' '안경' 등에 출연한 고바야시 사토미가 누나 치나츠로 출연.
일본 영화는 전철과 기차가 자주 나온다. 그만큼 일본 사람들이 기차를 좋아하는 듯. 오죽하면 전철을 타고 지나가며 찍은 풍경을 담은 블루레이 타이틀도 나왔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원안을 구성하고 각본도 썼다. 히로카즈 감독은 9세부터 28세까지 살았던 도쿄 기요세시의 아사히가오카 연립아파트에서 영화를 찍었다.
사설 탐정사무소에서 료타와 함께 일하는 여직원은 나카무라 유리가 연기. 성유리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한국 국적의 재일동포 4세 배우다. 그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도 출연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영화에 대부분 출연한 릴리 프랭키가 사설 탐정사무소장으로 출연.
189cm에 이르는 큰 키의 아베 히로시가 주인공 료타를 연기. 모델 출신인 그는 '걸어도 걸어도'에도 출연했다.
일본 지하철 JR광고로 유명한 마키 요코가 이혼한 전처로 등장. 그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로 일본의 각종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1943년생인 키키 키린은 '전원일기'의 김수미처럼 33세때부터 TV 드라마 '데리우치 간타로 일가'에서 할머니 연기를 했다. 당시 그의 아들을 연기한 고바야시 아세는 그보다 10세 연상이었다. 초등학생때 자폐증을 앓아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으나 훗날 연극무대에 서면서 배우가 됐다. 2004년 유방암 발병 후 전신에 암이 전이돼 2018년 75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히로카즈 감독은 원제 '바다보다 더 깊이'를 극 중 키키 키린이 듣는 등려군의 노래 '이별의 예감' 가사에서 따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