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19

갈보 콩

나는 입말이 살아 있는 글을 좋아한다. 김유정, 채만식, 이순원처럼 입말을 잘 살린 작가들의 글은 편안하고 구수하다. 그렇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시백도 마찬가지다. 그가 최근 펴낸 단편 소설집 '갈보콩'은 어찌나 능청스럽게 지방 사투리를 구사했는 지 마치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워낭소리' '두물머리' '충청도 아줌마' 등 함께 묶어놓은 11편의 이야기들은 농촌의 현실을 질퍽한 입담으로 모질게 쏟아놓았다. 농사꾼들이 옮기기도 쉽지 않은 사투리로 이죽거리며 풀어놓는 이야기는 절로 웃음이 나올 만큼 재미있다. 단순히 재미있는 것 뿐만 아니라 그 속에 뼈가 있다. 한미FTA, 개발사업에 희비가 엇갈리는 농촌의 현실을 길지 않은 이야기로 알맹이만 콕 찍어 재미있게 버무렸으니, 작가의 글 재주가 놀랍다. ..

2010.08.20

예언

국내에 노스트라다무스라는 이름을 널리 알린 인물은 일본 작가 고도우 벤이었다. 1981년 고려원에서 펴낸 그의 책 '지구 최후의 날'은 세계적인 대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시를 해석한 결과 1999년에 행성들이 그랜드 크로스 형태를 이루며 지구가 멸망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았다. 당연히 세상은 발칵 뒤집혔고 그의 책은 날개 돋친 듯 팔렸으며, TV프로그램에서도 이 문제를 다뤘다. 물론 결과는 고도우 벤의 해석과는 달랐다. 그런 점에서 고도우 벤은 노스트라다무스를 알리면서 죽이기도 한 인물이다. 사람들은 해석을 잘못한 고도우 벤이 아니라 노스트라다무스가 엉터리 예언을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뻥쟁이 노인네 취급을 받은 노스트라다무스는 세상의 비난과 달리 그리 녹녹한 인물이 아니다. 16세기 프랑스..

2010.08.14

한국의 체 게바라, 이현상 - '이현상 평전'

고교 시절인 1980년대 초반만 해도 우리 나라에서 쿠바의 혁명 영웅 체 게바라를 모르는 사람이 꽤 많았다. 오랜 세월 철저한 반공 교육과 숱한 서적들이 금서로 묶인 탓이었다. 괜시리 수업 시간에 체 게바라와 보 구엔 지압을 아는 척 했다가 깜짝 놀라며 호들갑을 떤 선생 덕에 한동안 시달렸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국내에서도 체 게바라는 티셔츠에 얼굴이 새겨질 정도로 패션 스타가 됐다. 바야흐로 혁명도 상품이 된 것이다. 패션 상품 뿐 아니라 책과 영화 덕분에 체 게바라는 이제 대중적 인물이 됐다. 하지만 의외로 한국판 체 게바라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나 항일 독립운동으로 청춘을 보낸 뒤 6.25를 거치며 지리산에서 빨치산으로 숨져간 이현상은 체 게바라 못지 않은 혁명가였다. ..

2010.03.21

프라하가 사랑한 천재들

여행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그래서 프라하 출장 전에 읽어보려고 조성관의 '프라하가 사랑한 천재들'이라는 책을 샀다. 그런데 정작 출장 전에는 못읽고 다녀와서 읽었다. 책을 읽으면 읽을 수록 화가 났다. 프라하에서 스쳐 지나간 거리와 건물들의 의미를 뒤늦게 알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뒤늦게 읽은 것도 아쉬웠지만, 현지 가이드는 어쩌자고 책 속의 내용들을 다 흘려버렸는 지 모르겠다. 아마 몰라서 그랬을 수도 있고, 관심이 없었을 수도 있다. 이 책은 일반 여행기와 다르다. 현지 풍물, 숙박, 상품 정보에 초점을 맞춘 여행기와 달리 유명 예술인들의 삶을 다뤘다. 카프카가 소설 '변신'을 쓰고, 스메타나가 '나의 조국'을 연주한 건물, 밀로스 포먼 감독이 영화 '아마데우스'를 촬영한 거리, 바츨라프 하벨..

2009.08.28

황석영,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장길산'으로 대표되는 황석영은 사실 르포르타주에 강한 작가다. 그가 쓴 '어둠의 자식들'과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보면 여실히 알 수 있다. 80년대 중반 고교 시절 몰래 읽었던 '어둠의 자식들'은 충격이었다. 걸걸한 육두 문자로 시작하는 이 책은 기지촌에서 태어나 창녀촌 등을 전전하며 아주 험하게 살아온 어느 사내의 이야기를 솔직 담백하게 옮겨 적은 실화다. 책의 실제 주인공은 나중에 국회의원을 지낸 이철용씨. 황석영이 당시 글을 쓸 줄 몰랐던 이 씨를 만나 이야기를 듣고 문학적 재능을 곁들여 만든 일종의 구술 문학이다. 우습게도, 제목 때문에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는 빨간 책 대접을 받았다. 이유야 어찌됐든, 이 작품은 대성공하며 황석영의 또다른 줄기를 이뤘다. 돈 없고 '빽'이 없어 ..

2009.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