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영화

관상

울프팩 2013. 9. 18. 13:10
예전에 한국 최고의 지관을 인터뷰 한 적이 있다.
국내에서는 기문둔갑의 정통 계승자로 꼽히는 그 노인은 유명한 전 대통령들부터 이름만 대면 알만한 재벌들의 묘터와 집터, 건물터 등을 두루 봐 준 분이다.

재미있는 점은 한 때 그 노인은 국내 대기업 신입사원 면접 때도 참가했단다.
지금은 고인이 된 창업주와 함께 연수원에서 신입사원들의 관상을 봤다는 것.

예나 지금이나 인상이 중요하다고 본 사람들이 많다.
그렇기에 면접에 대비해 성형수술까지 하는 세상이 됐다.

한재림 감독의 '관상'(2013년)은 이 같은 사람들의 심리에 부합하는 영화다.
내용은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빼앗는 계유정란에 휘말린 관상쟁이의 이야기다.

실제 역사에 가상의 이야기를 끼워넣은 전형적인 팩션이다.
그런데 설정은 그럴 듯 하지만 이야기가 단조롭고 밋밋하다.

터지는 웃음이나 눈길을 끄는 액션도 없고 이렇다 할 볼거리도 없다보니, 대형 스크린 보다는 TV에 어울릴 법한 얘기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관상을 억지로 역사적 소재에 끼워 넣으려다 보니 두 가지 모두 제대로 다루지 못한 양상이다.

관상의 신비로움도 살리지 못했고, 준엄한 역사적 사실 또한 대폭 생략됐다.
아마도 관상의 신비로움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건 관련 취재나 공부가 부족한 게 아닐까 싶다.

단순 생략 뿐 아니라 일부는 사실과 다르다.
물론 실록에 등장하지 않는 관상쟁이 얘기는 차치하고라도, 한명회는 영화처럼 경복궁 문지기가 아니라 개성에서 태조가 잠시 살기 위해 지었던 경덕궁을 관리하는 벼슬을 하다가, 계유정란 당시에는 그만뒀다.

수양대군과 맞섰던 대호라는 별명의 김종서도 영화처럼 현장에서 죽지 않았다.
영화에서는 갓 끈으로 묘사됐지만 실록을 보면 사모 뿔을 빌리러 온 수양대군에게 습격을 당한 김종서는 사돈댁으로 몸을 피했다가 그 곳에서 칼을 맞았다.

영화적 재미를 위해 변형과 생략을 하다 보니 사실이 틀어진 듯 싶다.
출연진을 보면 송강호 김혜수 이정재 백윤식 등 호화롭지만 이정재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살지 못했다.

특히 김혜수의 역할은 미미했다.
'건축학개론'에서 납득이로 나왔던 조정석 또한 캐릭터의 성격이 애매모호해 제대로 빛을 보지 못했다.

오로지, 수양을 연기한 이정재만 빛났다.
그는 초반 등장부터 카리스마 있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모래시계' 이후 가장 잘 어울리는 배역을 맡았다.

마치 한 상 잔뜩 벌려 놓았으나 유일하게 맛있는 반찬같은 존재였다.
반면 조명과 의상은 아주 훌륭했다.

김혜수의 고운 한복 결이 빛을 받아 은가루처럼 반짝이는 느낌이 올올이 잘 살았고, 실뱀처럼 머리를 싸고 도는 노리개나 다양한 색깔의 한복도 돋보였다.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늘어지는 이야기와 방점을 찍을 만한 에피소드 등이 없다보니, 좋은 재료에도 불구하고 맛없는 요리처럼 실망스런 작품이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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