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추천 DVD / 블루레이

빗속의 방문객

울프팩 2009. 4. 13. 02:17

어느 비오는 날, 낯선 이방인이 프랑스 마을에 나타난다.
여인은 몰랐지만 이방인은 강간 전과가 있는 흉악한 탈주범이었다.

이방인은 여인의 집에 몰래 숨어들어 강간을 하다가 여인의 총에 살해당한다.
남편이 알게 될까봐 두려웠던 여인은 시체를 바다에 던져 버린다.

며칠 뒤 그 마을에 또다른 낯선 사내가 나타난다.
거액을 훔쳐 달아난 강간범을 뒤쫓던 미군 수사관이다.

사내는 여인이 강간범을 죽였다는 사실을 눈치챈다.
사내는 강간범이 갖고 있던 돈의 행방 때문에 여인을 집요하게 추궁한다.

그 과정에서 사내는 외간 남자와 바람을 핀 어머니 때문에 아버지가 떠나버린 여인의 과거를 알게 된다.
과거의 상처 때문에 여인은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도 성폭행 사실이 알려지면 남편이 떠날까봐 두려워 한다.

그래서 사내는 바닷가에서 강간범의 시체를 찾아낸 날, 여인을 찾아간다.
그리고 여인의 손에 강간범이 죽을 때 쥐고 있던 여인의 단추를 돌려준다.
그렇게 어느 비오는 날 벌어졌던 사건은 사내와 여인의 가슴 속에 아무도 모르는 비밀로 묻힌다.

프랑스의 거장 르네 클레망 감독이 만든 '빗속의 방문객(Rider On The Rain, Le Passage De La Pluie, 1970년)은 프랑스 영화가 전성기를 누리던 70년대의 걸작이다.
미스테리한 스릴러 속에 알듯 모를듯 은은한 사랑이 흐르던 이 작품은 르네 클레망이라는 거장이 빚어낸 영상미와 수사관을 연기한 찰스 브론슨의 묘한 매력, 프란시스 레이의 애잔한 음악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뤘다.

특히 유리창에 호두를 던져 껍질을 깨던 찰스 브론슨의 독특한 행동과 프란시스 레이의 멜로디는 이 작품의 상징이다.
찰스 브론슨은 이 작품을 비롯해 '아듀 라미' 등 프랑스에서 작업한 일련의 느와르물로 하드 보일드의 상징같은 존재로 우뚝 섰다.

1980년대 주말의 명화에서 이 작품을 처음 본 뒤 프란시스 레이의 음악과 찰스 브론슨의 매력에 흠뻑 빠져 DVD가 나오기를 기다렸는데, 최근 뒤늦게 국내 출시됐다.
그러나 오랜 기다림 끝에 나온 DVD는 너무 실망스럽다.

케이스에는 16 대 9 애너모픽 와이드 스크린으로 표시됐지만 실제로는 4 대 3 풀 스크린이다.
당연히 좌, 우 화면이 뚝 잘려나가 르네 클레망의 황금같은 영상이 손상을 입었다.
화질도 비디오 테이프 수준이어서 DVD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다.

음향은 돌비디지털 5.0 채널을 지원하지만 역시 서라운드 효과를 기대하기는 무리다.
부록도 전무하다.

비록 DVD 타이틀은 허접하게 나왔지만 과거의 걸작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반갑다.

<파워DVD로 DVD 타이틀에서 순간포착한 장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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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찰스 브론슨. 이제는 볼 수 없는 명배우다. 그는 1921년에 찢어지게 가난한 광부의 집에서 15남매의 11번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강도, 폭력 등으로 교도소를 여러번 드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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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먹고 살기 위해 온갖 궂은 일을 했고,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배우가 된 뒤로 '황야의 7인' '대탈주' 등으로 이름이 알려져, 68년 알랑 들롱이 프랑스로 불러 '아듀 라미'와 '빗속의 방문객'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 등에 출연하면서 유럽에서도 큰 인기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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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에는 액션 시리즈인 '데스 위시'에 출연하며 인기를 끌었다. 그는 2001년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2003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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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 속에 찾아온 방문객. 극중 그의 이름은 공교롭게 맥거핀이다. 이름만 그런게 아니라 실제로 그는 맥거핀장치다. 살인 사건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는 클레망 감독의 위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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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여주인공 멜랑꼴리를 연기한 말렌느 조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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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1971년 미국서 골든글로브 외국어 영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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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음악이다. 프란시스 레이가 만든 음악은 세브린느가 부른 메인 타이틀도 유명하지만, 찰스 브론슨과 말렌느 조베르가 춤을 출 때 흘러나오는 왈츠 곡이 국내 CF 등에 사용되며 한때 널리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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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게 깔리는 저음으로 조베르를 "러브 러브"라고 부르던 브론슨의 목소리가 귀에 선하다. 브론슨은 앞치마에 써있는 단어 때문에 조베르를 극중에서 '러브 러브'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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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론슨은 유리창을 향해 호두를 힘껏 던진다. 유리창에 부딪힌 호두는 희한하게도 껍질만 깨진다. 브론슨이 던져보라며 조베르에게 호두를 권할 때 나오는 대사가 유명하다. "유리창이 깨지면 사랑에 빠졌단 거요." 70년대 낭만의 극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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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리따운 여인이 찰스 브론슨의 실제 부인인 질 아일랜드. 극중 조베르의 친구로 나왔던 그는 브론슨과 여러 편의 영화에 함께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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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브론슨은 유부녀인 질을 사랑했다. 터프했던 브론슨은 질의 남편인 영국 배우 데이빗 맥컬럼을 찾아가 "당신의 아내와 결혼하겠다"는 한마디를 던지고 둘 사이를 갈라 놓은 뒤 결혼했다. 질은 1990년 유방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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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는 낭만의 시대였다. 하드 보일드 영화에도 필립 머로우의 우수와 프란시스 레이의 애잔한 선율, 말못할 사랑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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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물이 아닌 액션물에서는 쉽게 보기 힘든 루거 권총. 미군 장교가 독일제 루거 권총을 사용한다는 설정이 다소 황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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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50의 사내라고 믿기힘들 만큼 탄탄한 근육질 몸매를 과시했던 브론슨. 그의 근육은 운동 이전에 험한 생활에서 실전을 통해 다져진 오리지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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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느와르의 특징은 직접적인 액션보다는 사내들의 고독함이 짙게 풍기는 분위기다. 그래서 액션 장면은 그다지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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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을 만든 르네 클레망 감독은 51년에 '금지된 장난'으로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알랑 들롱이 주연한 60년대 영화 '태양은 가득히'와 '빗속의 방문객' 등으로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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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의 비밀을 가슴에 묻고 떠나는 사내는 마지막으로 호두를 등 뒤로 던진다. 와장창, 유리가 깨져버렸다. 70년대 낭만이 절절히 흐르던 영화는 그렇게 사랑에 빠진 사내를 떠나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