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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만한 DVD / 블루레이

악의 손길(블루레이, 감독판)

울프팩 2020. 9. 28. 00:35

국내에서는 '검은 함정'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된 오손 웰스(Orson Welles) 감독의 흑백 영화 '악의 손길'(Touch Of Evil, 1958년)은 비운의 걸작이다.

자신의 연출력을 과신했던 오손 웰스는 시나리오의 완성도가 떨어져도 작품을 훌륭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시나리오를 고른 작품이 이 작품이었다.

오손 웰스는 중요한 배역인 퀸란 형사를 맡는 조건으로 적은 보수만 받고 출연과 연출까지 했다.

 

당시 몇 년 간 유럽에 머물며 이렇다 할 작품 활동을 하지 못했던 오손 웰스는 어떻게든 이 작품으로 할리우드에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오손 웰스는 부족하다고 생각한 시나리오를 연출 현장에서 몇 번씩 다시 고쳐 썼다.

 

비운의 저주 받은 걸작

그렇게 해서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찰튼 헤스톤(Charlton Heston)을 멕시코 마약 단속국 반장 바가스에, 자넷 리(Janet Leigh)를 그의 아내 역할로 섭외해 영화를 찍었다.

또 왕년의 무성영화 시절 최고 스타였던 마를렌 디트리히(Marlene Dietrich)가 뇌쇄적인 술집 마담으로 깜짝 출연했다.

 

웰스가 기라성 같은 스타들을 기용하고 연출에 대한 자신감으로 충만한 이 작품을 세상에 선보였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미국에서도 동네 변두리의 동시 상영관을 전전하다가 소리 없이 사라졌다.

 

이것으로 오손 웰스의 감독 경력은 끝장났다.

웰스는 이후 두 번 다시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

 

흥행 실패에는 제작사인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책임도 있다.

웰스의 연출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유니버설은 다른 편집자를 기용해 마음대로 가위질했다.

 

그 바람에 이야기를 이해하기 힘든 작품이 돼버렸다.

그렇게 난해한 작품이 돼버린 이 영화는 훗날 95분짜리 극장판을 다시 편집해 108분으로 늘렸지만 여전히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간섭 때문에 웰스의 연출 의도가 제대로 살아나지 못했다.

 

제대로 된 판본으로 선보인 것은 개봉 후 40년이 흐른 1998년이었다.

오스카상에 빛나는 유명한 편집자 월터 머치(Walter Murch)가 웰스의 메모를 참고해 3분이 더 늘어난 판본으로 다시 선보였다.

 

웰스는 처음 나온 유니버설 편집판을 본 뒤 이대로 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연출 의도를 꼼꼼히 적은 58페이지 분량의 메모를 스튜디오에 보냈다.

월터 머치는 이 메모를 참고로 편집했다.

 

월터 머치의 편집본이 그나마 가장 웰스의 연출 의도를 살린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블루레이에 수록된 작품은 바로 월터 머치의 편집본이다.

 

경이로운 카메라 워킹과 연출

이 작품은 웰스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거나 그의 작품을 보지 않은 사람들도 조금만 주의 깊게 보면 걸출한 카메라 움직임과 교차 편집 등을 통해 그의 뛰어난 연출력을 실감할 수 있는 누아르물이다.

이 작품에는 요즘 영화에서 보기 힘들거나 또는 익숙하게 보이는 연출 기법이 자주 보인다.

 

그렇게 엇갈리는 이유는 요즘 영화들이 웰스를 흉내 냈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 의식적으로 그런 연출을 피했거나 워낙 익숙한 기법이어서 무의식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일 수 있다.

그만큼 이 작품에는 신선하거나 익숙한 장면들이 종종 보이는데 무려 60년 전 작품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새삼 웰스가 얼마나 위대한 영화인이었는지 절감할 수 있다.

 

내용은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 마을에서 발생한 의문의 차량 폭발사고를 수사하는 미국의 퀸란 형사와 멕시코 마약단속국 반장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수사 과정에서 지역 폭력배들에게 마약단속국 반장의 아내가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하고 퀸란 형사는 이들을 비호하는 듯한 행태를 보이면서 사건이 얽히고설키게 된다.

 

우선 이 작품은 첫 시퀀스부터 경이롭다.

처음 등장하는 바가스 부부를 따라 움직이는 카메라는 폭탄이 설치된 차량이 폭발할 때까지 4분여 동안 한 번도 컷 하지 않고 롱 테이크로 길게 이어진다.

 

이후에도 등장하는 컷 없이 이어지는 롱 테이크의 심문 장면이나 불량배들의 대화 등은 이야기의 흐름을 물 흐르듯 유연하게 끌고 가는 역할을 한다.

이후 웰스는 사라진 아내를 찾는 바가스와 불량배들의 움직임, 의문의 행적을 보이는 퀸란 형사의 모습을 교차 편집해 긴장감을 높인다.

 

이와 함께 이 작품에서 눈여겨볼 만한 부분은 카메라 구도와 조명이다.

중요한 장면에서 대부분의 인물을 앙각으로 잡아 거대하고 드라마틱하게 보이도록 했다.

 

촬영 당시 오손 웰스는 뚱뚱하지 않았으나 옷 안에 패드를 넣고 앙각을 적극 활용해 덩치가 커 보이도록 했다.

조명 또한 캐릭터들의 성격을 부각하는 역할을 했다.

 

대화 장면을 보면 배우들의 얼굴 절반에만 조명이 떨어진다.

얼굴의 나머지 절반은 짙은 어둠에 쌓이면서 빛과 어둠의 대비가 마치 인간 내면의 선과 악의 이중성을 보여주는 듯하다.

 

백조의 송가 같은 작품

사실 이 영화에는 오손 웰스의 삶이 투영돼 있다.

그가 연기한 퀸란 형사는 작품 속에서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왕처럼 등장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바가스의 등장으로 그의 권력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궁지로 몰린다.

 

결국 모든 것을 잃고 몰락하는 퀸란 형사의 모습은 공들여 작품을 만들고도 편집권까지 빼앗긴 채 스튜디오의 눈치를 봐야 하는 웰스의 모습 같다.

한때는 모든 것을 가졌던 거대한 왕의 모습 같은 퀸란의 최후를 지키는 것은 영락한 술집 마담뿐이다.

 

그런 술집 마담을 연기한 배우가 쇠락한 흑백영화의 대스타였던 마를렌 디트리히라는 점이 흥미롭다.

그의 모습은 전성기가 지닌 웰스의 또 다른 반영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백조의 울음처럼 거장의 마지막 송가 같은 작품이다.

아울러 새삼 웰스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최후의 징표이기도 하다.

 

1080p 풀 HD의 1.85 대 1 화면비를 지원하는 블루레이 타이틀은 화질이 그저 그렇다.

그레인이 두드러지고 일부 장면은 윤곽선이 흐릿하다.

 

심지어 일부 장면은 비 오듯 세로 줄무늬가 다수 나타난다.

제작연도를 감안하면 어쩔 수 없다.

 

음향은 DTS HD MA 2.0 채널을 지원한다.

부록으로 두 편의 음성해설과 제작과정 등이 들어 있으나 모두 한글자막을 지원하지 않아 아쉽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찰튼 헤스톤과 자넷 리가 부부로 등장.
마를렌 디트리히가 술집 마담으로 깜짝 등장한다.
원작은 휘트 매스터슨이 쓴 소설 '악의 배지'다. 이를 웰스가 각색했다.
웰스는 원근법을 이용한 인물의 배치를 통해 공간을 크고 넓게 보이는 효과를 발휘했다. 즉 공간의 왜곡을 통한 극적 긴장을 유발했다.
앙각과 그림자의 활용으로 전면에 선 인물들을 거대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음악은 헨리 맨시니가 맡았다.
촬영은 러셀 메티가 맡았다. 그는 유명한 TV시리즈 '월튼네 사람들'을 비롯해 '오메가 맨' '천의 얼굴을 가진 사나이' 등을 찍었다.
월터 마치는 이 작품으로 오손 웰스 사후인 1998년에 LA 비평가협회 특별공헌상을 받았다.

 

 
 
악의 손길 (2Disc)
 
크로아티아 랩소디
최연진 저
 
악의 손길 : 블루레이
 
예스24 | 애드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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