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추천 DVD / 블루레이

열혈남아

울프팩 2006. 1. 24. 18:48

올림픽이 열리던 해였으니 1988년으로 기억한다.
새 학기가 시작돼 대학에 수강신청을 하러 갔다가 고교 후배를 만났다.

점심을 먹으며 영화 얘기를 하던 중 녀석이 갑자기 "죽이는 영화를 봤다"며 입에 침을 튀기기 시작했다.
녀석 왈, "최근 일본에서 붐이 일어난 작품인데, 국내에서는 지난해 말 변두리 극장에 며칠 걸렸다가 사라졌다"며 "최근 비디오테이프를 빌려 봤는데 극장에서 못 본 게 한이 될 만큼 멋진 작품"이라고 열변을 토했다.

그 작품이 바로 왕가위(王家卫) 감독의 데뷔작 '열혈남아'(As Tears Go By, 1987년)였다.
궁금함을 참지 못해 그날 당장 비디오테이프로 빌려본 작품은 나를 완전히 사로잡았다.

당시 더블데크가 없어 VTR을 재생하며 TV에 연결된 비디오카메라로 녹화를 뜬 뒤, 이를 다시 VTR로 옮기는 2번의 작업을 거쳐 복사한 테이프를 100번 이상 봤다.
어찌나 많이 봤던지 특정장면 대사는 중국어 발음을 줄줄 흉내 냈고 왕걸과 엽환이 부른 노래도 거의 외우다시피 했다.

'열혈남아'가 그토록 나를 미치게 했던 것은 아련함이었다.
한창 감수성 예민하고 열정으로 피가 끓던 청춘에게 왕가위가 던진 허무와 분노, 열병 같은 사랑의 영상과 음악은 어찌할 수 없는 슬픔과 분노가 범벅된 안타까움 그 자체였다.


당시 학생들의 시위와 민주화 운동으로 시끄럽던 시대상하고도 맞아떨어졌다.
그렇게 청춘의 한 때가 고스란히 기억된 복사본 비디오테이프를 지금도 갖고 있다.


DVD까지 출시됐는데도 불구하고 영상마저 희미하게 바랜 테이프를 소중히 간직하는 이유는 무삭제판이기 때문이다.
국내는 물론이고 홍콩, 대만에 출시된 DVD 타이틀은 기가 막힌 엔딩과 왕걸의 노래가 삭제된 홍콩판이다.

 

원래 국내 상영본인 대만판은 총 맞은 유덕화의 뒷 이야기와 서러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 왕걸의 주제가, 엽환과 왕걸이 듀엣으로 부른 삽입곡이 들어있다.
그래서 DVD와 별도로 비디오테이프를 간직해 오다가 최근 홍콩에서 나온 골든 컬렉션 DVD를 다시 구입했다.


엔딩은 비록 잘려나갔지만 왕걸의 주제가, 왕걸과 엽환의 듀엣곡이 고스란히 복원됐기 때문이다.
16 대 9 애너모픽 와이드 스크린을 지원하는 골든 컬렉션 DVD 타이틀은 화질이 좋지 않다.


물론 비디오테이프보다는 깨끗하고 좋지만 색상도 번지고 어두운 부분의 세부 묘사가 떨어진다.
음향은 광둥어의 경우 DTS까지 지원하는데, 왕걸의 노래를 제대로 들으려면 돌비디지털 2.0 채널로 녹음된 북경어를 선택해야 한다.


광둥어를 선택하면 황당하게도 왕걸과 엽환의 노래 대신 베를린의 'Take My Breath Away'가 흐른다.
한마디로 홀딱 깬다.


따라서 과거의 아련함을 느껴보려면 반드시 북경어로 들어야 한다.
아울러 온전한 엔딩을 볼 수 있는 대만판이 DVD 타이틀로 나왔으면 좋겠다.

<DVD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왕가위 신화의 시작을 알린 이 작품은 카메라 앵글이 독특하다. 이처럼 독특하며 뛰어난 촬영은 바로 유위강 촬영감독의 솜씨다. 유위강은 훗날 '무간도'의 감독과 '무간도 2'의 촬영을 맡은 인물. 크리스토퍼 도일을 만나기 전 왕가위는 유위강 덕분에 영상 감각이 뛰어난 감독으로 알려지게 됐다.
당구장에서 쫓고 쫓기는 인물들을 따라 횡으로 길게 움직이는 스피디한 카메라 트랙킹은 유위강을 다시 보게 만들 만큼 일품이다.
유덕화가 이렇게 젊었던 시절이 있었다. 유덕화는 물론이고 장만옥도 이 작품을 그들의 최고 출연작으로 꼽는다.
영화는 몇 년 뒤 홍콩 반환을 앞둔 시점에 불안하게 흔들리는 홍콩 젊은이들의 모습을 그렸다. 조폭 중간보스인 유덕화는 내일을 알 수 없는 불안한 삶 속에서 하루하루가 세상의 종말인 양 자신을 내던진 채 살아간다.
왕가위 열풍의 도화선인 스텝 프린팅이 바로 이 장면에서 등장한다. 옥스베리사의 현상 장비를 이용한 스텝 프린팅은 24 프레임을 1,2,3,4...의 정상 순서로 현상하는 게 아니라 1,1,2,4,4,5,5,6...처럼 특정 프레임을 반복해 길게 늘이거나 건너뛰는 현상 방법으로, 마치 영상이 빠른 속도로 넘어가면서도 동시에 툭툭 끊어지는 슬로 모션처럼 보여 아주 독특한 느낌을 준다. 왕가위가 선보인 스텝 프린팅은 이후 유행처럼 영화계에 번져 '비트' '무사' 등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이 장면은 스텝프린팅과 더불어 푸른 형광등 조명도 인상적이었다.
창백한 유덕화 얼굴 위로 머리카락처럼 흘러내리던 한줄기 핏물마저 푸르게 빛났다.
이 영화 최고의 명장면.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터미널로 허둥지둥 달려온 장만옥은 유덕화가 보이지 않자 허무하게 서있는다. 순간, 어둠 속에서 쏜살같이 튀어나온 유덕화가 장만옥의 손을 낚아채 공중전화박스로 달려간다. 두 사람은 하얗게 부서져 내리는 형광등 조명아래 격렬한 키스를 나눈다. 형광등 불빛은 점점 하얗게 타오르며 두 사람의 모습도 함께 바래서 날아오른다. 이때 흘러나오는 유명한 노래가 바로 왕걸과 엽환이 부른 '汝是我胸口永遠的通'(너를 보낸 내 가슴은 아프고)이라는 노래다.
떠나가는 연인을 잡지 못해 울듯 말듯하던 장만옥 표정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유덕화는 물론이고 장만옥도 이 작품을 그들의 최고 출연작으로 꼽는다.
이 장면은 오래도록 대사가 기억에 남았다. 죽으러 가는 장학우를 말리기 위해 애인도 뿌리치고 달려온 유덕화는 꼭 가야겠다면 함께 가겠다고 나선다. "은혜를 갚을 수 없으니 나한테 잘해주지 말라"며 절규하던 장학우의 대사가 지금도 생생하다.
장학우가 조직의 배신자에게 총탄을 퍼붓고 죽어가던 이 장면에서도 스텝 프린팅이 쓰였다.
장학우의 죽음을 눈앞에서 본 유덕화는 눈이 뒤집혀 경찰서로 달려가 총질을 한다.
총탄을 맞고 쓰러진 유덕화의 심장이 쿠웅 쿠웅 울리는 소리와 함께 홍콩판은 막을 내린다. 그러나 대만판은 뒷이야기가 더 있다. 살아난 유덕화는 머리에 총을 맞은 탓에 음식조차 제대로 씹지 못할 만큼 바보가 된다. 그런 그를 면회 온 장만옥은 유덕화 입에 귤을 넣어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그때 왕걸의 노래가 아련하게 흘러나온다. 내용, 영상, 음악 모두 왕가위 최고의 영화로 꼽을 만한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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