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볼 만한 DVD / 블루레이

철도원(블루레이)

울프팩 2020. 9. 23. 00:57

후루하타 야스오 감독의 '철도원'(鐵道員: ぽっぽや, 1999년)은 눈발이 펄펄 날리는 풍경만으로도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작품이다.

그 속에 검은 제복을 입은 중년의 남자가 플랫폼에서 오롯이 눈을 맞으며 서 있는 영상은 한 폭의 시다.

 

그만큼 이 작품은 영상으로 모든 것을 말하는 훌륭한 작품이다.

그렇다고 영상이 전부인 작품은 아니다.

 

이야기나 서정적인 연출, 배우들의 묵직한 연기 또한 영상 못지않게 훌륭하다.

아사다 지로의 동명 단편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일본 단카이 세대의 아픔과 회한을 그리고 있다.

 

일본 단카이 세대는 1960년대 이념적 갈등의 시기인 전공투 시절을 거쳐 경제 발전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다.

가족과 일터를 위해 개인을 버려야 했던 그들은 일과 직장, 가족이 전부였던 세대다.

 

그만큼 경제대국이 된 오늘날 일본은 묵묵히 자기희생을 미덕으로 여긴 단카이 세대에게 빚을 지고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

 

1970년대 고도성장의 그늘에는 일본 단카이 세대처럼 노동에 모든 것을 바친 우리 아버지 세대의 희생이 숨어 있다.

그들 역시 단카이 세대처럼 개인을 돌볼 겨를 없이 가족과 국가 경제 발전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그들에게 이념적 지향점을 따지며 민주화에 적극 나서지 못했다고 탓하는 것은 어찌 보면 사치일 수 있다.

영화 속 주인공인 사토(다카쿠라 켄) 역장은 단카이 세대의 상징 같은 인물이다.

 

그는 찾는 사람이 별로 없는 홋카이도의 한적한 시골 마을의 기차역에서 평생을 일하고 정년퇴직을 며칠 앞둔 철도원이다.

그는 일하느라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 딸아이는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열병을 앓다 죽었고 병을 앓던 부인 역시 쓸쓸히 숨졌다.

 

따라서 사토에게는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에 대한 회한과 슬픔이 평생의 빚처럼 남아 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딸아이에게 사준 인형과 똑같은 인형을 가진 소녀(히로스에 료코)가 나타났다.

 

그렇게 불쑥 찾아온 정체불명의 소녀는 그에게 밥도 해주고 말동무도 해준다.

그 소녀는 마치 그의 마음을 무겁게 내리누르고 있는 마음의 빚을 알고 있으니 이제 내려놓으라는 것처럼 위안이 된다.

 

그렇게 사토 역장은 소녀의 위로를 선물처럼 받으며 철도원으로서, 한 남자이자 가장으로써 쓸쓸하게 마지막을 준비한다.

사토 역장의 이야기는 억지로 눈물을 쥐어 짜내는 이야기 없이도 가슴을 아련한 슬픔으로 채운다.

 

특히 나이를 먹어 단카이 세대와 동시대를 살아간 우리네 아버지 나이가 훌쩍 지나고 보니 사토 역장의 회환가 슬픔이 동병상련의 아픔으로 진하게 다가온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젊은 세대들보다는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야 더 와 닿을 수 있는 작품이다.

 

아무래도 요즘 젊은 세대들과 과거 아버지 세대는 지향점과 가치관, 삶의 방식이 확연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때는 개인보다는 집단, 국가와 직장을 우선했으나 지금은 일과 삶의 균형을 의미하는 워라밸을 중시하는 것처럼 개인의 안녕과 행복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는 어느 것이 옳고 그르냐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가 요구하는 삶의 모습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더 이상 국가와 조직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요구하는 시대가 아니다.

 

안타까운 과거 세대의 희생은 희생대로 인정하되 달라진 요즘 세대의 삶과 취직난, 주택난 등으로 대변되는 시대적 고통 또한 직시해야 한다.

그래야 이 작품이 안고 있는 사토 역장의 고뇌와 번민을 세대를 떠나 올 곳이 투영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세상을 온통 하얗게 뒤덮는 홋카이도의 설경이다.

지구 온난화로 서울에서 더 이상 큰 눈을 보기 힘든 요즘 소담스럽게 내리는 홋카이도의 눈 풍경은 그 자체로 진귀한 선물이다.

 

영화를 보다 보면 과거 홋카이도를 수 차례 방문했을 때마다 감탄했던 눈 풍경이 절로 떠오른다.

삿포로 시내에 무릎 높이로 쌓인 눈은 물론이고 시를 조금만 벗어나 비에이로 접어들면 키를 훌쩍 넘는 높이로 눈이 쌓였다.

 

오죽하면 차도에 눈높이를 알리는 표시기가 있을 정도다.

새삼 영화를 보다 보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예전처럼 갈 수 없게 된 홋카이도의 설경이 그리워진다.

 

더불어 다카쿠라 켄의 묵직한 연기를 빼놓을 수 없다.

2014년 세상을 떠난 그는 이 작품에서 보여준 과묵한 연기로 몬트리올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아울러 사카모토 류이치의 서정적인 음악이 애잔한 아픔을 더한다.

그만큼 아름다운 풍경과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 서정적인 음악이 조화를 이루는 훌륭한 영화다.

 

1080p 풀 HD의 16 대 9 화면비를 지원하는 블루레이 타이틀은 화질이 그저 그렇다.

DVD보다는 좋지만 블루레이 치고는 아쉬운 화질이다.

 

입자가 거칠고 윤곽선도 두터운 영상은 초반보다 뒤로 갈수록 안정적이다.

특히 현재보다 단색에 가까운 과거 장면의 화질이 떨어진다.

 

그나마 클로즈업은 그런대로 괜찮다.

리니어 PCM 5.1 채널을 지원하는 음향은 사운드가 전방에 집중돼 있다.

 

눈보라 소리가 리어 채널에서 들리는 등 서라운드 효과는 간헐적으로 나타난다.

부록은 예고편뿐이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일본 도에이영화사가 만든 이 작품은 제117회 나오키상 수상작인 아사다 지로의 단편 소설이 원작이다.
홋카이도의 시골마을인 호로마이의 이쿠도라역을 배경으로 한다. 1902년 개설된 이쿠도라역은 소라치군 미나미 후라노초에 있다.
영화속에서 이쿠도라역은 호로마이선의 종착역으로 나오는데 실제 이쿠도라역은 종착역이 아니어서 마치 종점처럼 보이도록 꾸며놓고 찍었다.
1957년에 제작된 빨간 기차는 더 이상 운행하지 않는다. 이쿠도라역 근처에 전시돼 있다.
극 중 등장하는 역 앞 식당 다루마는 지금도 있다.
역명은 홋카이도 원주민인 아이누어로 '사슴에 이르는 강'이라는 뜻이다.
이쿠도라를 가려면 삿포로에서 아사히카와 특급을 타고 타키카와까지 가서 후라노행 열차로 갈아타야 한다. 그 뒤 후라노에서 신토쿠행 기차를 타고 40~50분 더 가야한다. 그만큼 가는 길이 만만찮다.
"기차나 사람이나 오래되면 추억이 되는거야" 극 중 대사가 가슴을 친다.
죽은 아내 역할은 오타케 시노부가 연기.
의문의 소녀는 히로스에 료코가 연기.
수묵화 같은 풍경이 한 몫하는 영화다.
이쿠도라역은 현재 무인역으로 운영된다. 이 영화 촬영 당시 소품 등이 역사 한 켠에 전시돼 있다.
아름다운 풍광은 기무라 다이사쿠 촬영감독이 찍었다.
원작 소설을 쓴 아사다 지로는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같은 소설가인 미시마 유키오의 자살에 영향을 받아 육상자위대에 입대했다. 전역 후 사업으로 돈을 벌었고 1995년 이 작품의 원작 소설을 발표했다.

 

 
 
크로아티아 랩소디
최연진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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