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추천 DVD / 블루레이

친구 (UE)

울프팩 2005. 6. 3. 23:17

어제 오랜만에 비가 내렸다.
비를 보면 떠오르는 영화가 두 편 있는데 하나는 프랑스 영화 '빗속의 방문객'이고 하나는 바로 곽경택 감독의 '친구'(2001년)다.

안타깝게도 '빗속의 방문객'은 프랑스에서도 아직 DVD가 출시되지 않아서 다시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다.
그렇지만 우리 영화 중 가장 좋아하는 '친구'는 DVD로 갖고 있기에 비가 간혹 본다.

'친구'와 관련해 두 가지 기억이 있다.
모두 사람에 대한 기억이고, 그것도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다.

한 사람은 영화를 찍은 황기석 촬영감독이고, 또 한 사람은 배우 유오성이다.
2003년 여름, 서울 강남의 오피스텔에서 황기석 촬영감독을 만났다.

당시 그가 작업실로 쓰던 오피스텔에 '친구'의 조감독이었던 안권태 감독이 와서 입봉작 '우리 형'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날 황 감독은 촬영감독들이 즐겨 본다는 미국 영화잡지를 하나 내밀었다.

바지를 둘둘 말아올린채 물에 들어가 어딘가를 바라보는 노인네 사진이 표지였다.
황 감독은 빠른 말투로 사진을 가리키며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사진 속 주인공은 '아메리칸 뷰티' '내일을 향해 쏴라' '로드 투 퍼디션' 등을 찍은 콘래드 홀 촬영감독이었다.
그가 좋아하는 콘래드 홀이나 황 감독이나 모두 빛에 민감한 사람들이다.

그날도 황 감독은 조명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의 얘기를 듣고 집에 와서 '친구'를 다시 보니 느낌이 확연하게 달랐다.

황 감독은 그렇게 '친구'를 다시 발견하게 만들어준 장본인이다.
유오성은 '친구' DVD와 관련이 있다.

어느날 아내가 금속 케이스로 만들어 제법 묵직한 '친구' Ultimate Editon DVD를 들고 나갔다.
책, 음반, DVD 등을 절대 빌려주지 않는 것을 잘 아는 아내가 DVD를 들고 나갔으니 궁금했다.

그날 방송을 마치고 돌아온 아내가 '친구' DVD를 다시 건네줬다.
그렇지 않아도 궁금하던 차에 받아서 케이스를 열어보니, 내부 케이스에 유오성 사인이 있었다.

아내가 담당한 TV 프로에 유오성이 출연하게 돼 내 얘기를 하며 사인을 부탁했단다.
남편이 '친구'를 너무 좋아해 사인을 받아가면 아주 기뻐할 거라고...

그 얘기를 들은 유오성이 좋아하며 여기저기 사인을 해주었다.
사인을 해준 유오성도 고마웠지만 아내의 정성이 더 고마웠다.

지금도 '친구' DVD 케이스를 열면 눈 앞 가득 펼쳐지는 유오성 사인 위로 아내의 고마운 마음이 보인다.
그래서 '친구'를 더 좋아하게 됐다.

금속으로 제작된 '친구' UE DVD의 아웃케이스.
아내가 일부러 출근 길에 들고나가 받아온 유오성의 사인.

<DVD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영화의 독특한 질감은 황기석 촬영감독이 실버 리텐션 기법을 사용해 만들었다. 실버 리텐션이란 필름 현상과정에서 은입자를 씻어내지 않고 남겨두는 것으로, 명암이 강조되며 색감은 약간 탈색된 듯한 느낌을 준다.
물방울이 하나 하나 보이는 장면은 샤프니스를 강조하는 개각도 촬영을 했다.
이 장면은 미국에서 뮤직비디오를 곧잘 찍은 황감독이 뮤직 비디오 기법인 더블타임 플레이백 방법으로 촬영했다. 더블타임 플레이백은 평소보다 2배 빠른 속도로 노래 부르고 카메라 역시 2배 빠른 48프레임 속도로 촬영한다. 이를 정상 속도로 재현하면 노래는 정상 속도로 나오는데 동작이 슬로 모션으로 보인다.
로버트 팔머의 노래가 흐르는 가운데 배우들이 질주하는 장면도 뮤직 비디오에 자주 쓰이는 프리즈 프레임 기법으로 촬영했다. 프리즈 프레임은 갑자기 정지화면처럼 그림이 멈추는 것. 이를 위해 황감독은 국내 최초로 현장 편집기를 동원, 현장에서 편집했다.
이 작품의 최대 발견은 장동건이다. 유오성은 기대한 만큼 제 몫을 톡톡히 했고 장동건은 기대 이상 했다. 그저 잘 생긴 줄만 알았던 장동건이 저런 카리스마를 뿜어낼 줄 몰랐다. 실로 대단하다는 말이 아깝지 않을 만큼 열연했다.
이 영화의 촬영을 위한 기본 컨셉은 투샷이다. 언제나 프레임 안에 두 사람이 가득하다. "액션보다 사람의 관계를 강조한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였다"는게 황 감독 설명이다.
"많이 묵었다, 고마해라." 이때 쏟아지는 비 사이로 뤽 베야르 음악이 흘렀고 칼날이 장동건의 몸을 파고들던 소리가 천둥처럼 극장을 울렸다. 그야말로 음악과 그림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명장면이다. 영화에서는 비가 쏟아졌지만 촬영 당시 햇빛이 강해 10미터짜리 실크 스크린을 친 뒤 비를 뿌리고 찍었다.
황기석의 카메라는 마치 배우와 대화하는 것 같다. 칼을 맞고 천천히 넘어가는 장동건의 몸을 따라 카메라도 45도로 쓰러진다. 비에 쓸린 핏물은 위로 흐르는 것처럼 배수로로 쏟아져 들어간다.
곽 감독이 눈물을 흘렸다는 장면. 실화인 만큼 옛 생각이 났으리라. 저 장면은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해가 간다. 친구를 처음 면회간 날 심정은 참으로 참담했다. 특히 친구의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은 천마디 말보다 더 가슴을 쓰리게 만든다.

'추천 DVD / 블루레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야  (17) 2005.07.03
피와 뼈  (0) 2005.06.06
남과 여  (2) 2005.05.09
고래의 도약  (8) 2005.04.26
엑소시스트 (The Version You've Never Seen)  (5) 2005.0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