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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만한 DVD / 블루레이

태백산맥(블루레이)

울프팩 2021. 10. 24. 00:06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 황석영의 '장길산', 나관중의 '삼국지연의' 같은 대하소설은 영화로 만들기 힘든 작품들이다.

두어 시간 남짓한 상영시간에 압축해 소화하기에는 내용이 너무 방대하기 때문이다.

 

굳이 만든다면 '반지의 제왕'을 만든 피터 잭슨 감독처럼 여러 번 끊어 만들 수밖에 없을 듯싶다.

삼국지도 영화의 경우 재미있는 부분만 끊어서 만든 경우가 많다.

 

그렇지 않으면 박경리의 '토지'처럼 긴 이야기를 소화할 수 있는 드라마로 만드는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조정래의 10권짜리 대하소설을 영상으로 옮긴 임권택 감독의 '태백산맥'(1994년)은 용감하면서 무모한 도전이다.

 

아쉬움 큰 영화

2시간 44분의 남과 북이 이념 대립으로 갈리게 된 민족 비극의 배경을 모두 녹여 넣기에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정일성 촬영감독이 카메라를 잡고 김수철이 음악을 맡았으며 '넘버 3'의 송능한 감독이 각색을 맡는 등 쟁쟁한 제작진이 달라붙었지만 한계가 명확히 드러난 작품이다.

 

조정래의 원작 소설은 형제이면서 이념 때문에 서로 대립하게 된 염상진(김명곤)과 염상구(김갑수)의 대립을 기본 축으로 다양한 인물들이 얽히고설키면서 해방 후 좌우익 대립부터 한국전쟁까지 이어지는 장대한 서사시다.

하지만 영화는 상영 시간의 제한 때문에 상당 부분 내용을 압축하고 생략하면서 소설이 안고 있는 깊이감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

 

특히 소설 후반부에 등장하는 빨치산들의 지리산 투쟁 부분은 대부분 생략됐다.

뿐만 아니라 영화적 한계 때문에 원작과 달리 내용을 바꾸면서 본질이 왜곡된 부분도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염상구에게 몸을 버린 뒤 체념하지 않고 강한 빨치산 여전사로 거듭나는 외서댁이다.

영화에서는 외서댁이 모든 것을 포기하는 설정으로 바꿔 버리면서 빨치산의 동력이 된 민중의 자각이라는 메시지를 상실했다.

 

또 인텔리겐차인 정하섭(신현준)과 사랑에 빠진 무당 소화(오정해)의 이야기도 단순히 남녀 간의 로맨스로만 치부하면서 당시 계급적 갈등 때문에 겪는 질곡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

아울러 OSS 출신이면서 미군과 우익에 대한 반감으로 좌익에 더 기우는 지주의 아들 김범우(안성기)의 이야기도 전후 과정이나 배경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무색무취의 기회주의적 지식인 정도로만 묘사됐다.

 

생략과 왜곡된 내용, 희석된 메시지

한마디로 남북으로 갈리게 된 민족 비극의 단초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인물들의 관계가 상당 부분 희석됐거나 제대로 표현되지 않았으며 심지어 왜곡되기까지 했다.

그런 점에서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다.

 

정지영 감독이 만든 비슷한 성격의 영화 '남부군'과 비교하면 더더욱 아쉬움이 크다.

이야기 구성의 완성도와 원작이 갖고 있는 주제를 메시지로 녹여낸 밀도 면에서 '남부군'이 이 작품보다 한 수 위다.

 

재미있는 것은 안성기의 경우 '태백산맥'과 '남부군' 모두에서 중심인물로 등장한 점이다.

다만 '남부군'에서는 이야기가 안성기를 중심으로 흘러가지만 '태백산맥'에서는 주인공인데도 불구하고 안성기보다는 염상구에게 더 집중하게 된다.

 

그만큼 염상구가 강렬한 캐릭터 여서도 그렇지만 김갑수가 눈에 띄게 연기를 잘했다.

덕분에 그는 제33회 대종상, 백상 예술대상, 청룡영화상 등 다양한 연기상을 수상했다.

 

이밖에 방은진, 정경순 등 낯익은 배우들이 많이 나오고 지드래곤(권지용)이 동네 꼬마로 아역 출연해 눈길을 끈다.

하지만 신현준의 어색한 연기는 옥에 티다.

 

그는 대사 처리가 부자연스럽고 연기도 뻣뻣해 보인다.

국내 출시된 블루레이 타이틀은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 있다.

 

한글자막 없는 블루레이

바로 한글 자막의 누락이다.

예전 영화여서 녹음 상태가 좋지 않고 사투리가 섞여 있는 만큼 한글자막을 반드시 넣어줘야 대사 전달이 명확하게 되는데 영화 본편에 한글 자막이 전혀 들어있지 않다.

 

1080p 풀 HD의 1.85 대 1 화면비를 지원하는 블루레이 타이틀은 장면에 따라 화질 편차가 심하다.

잡티와 스크래치가 자주 보이고 미세하게 화면이 떨린다.

 

전체적으로 색감이 괜찮지만 일부 장면은 색이 바랬다.

플리커링이 자주 나타나고 중경과 원경에서 윤곽선이 두껍게 보인다.

 

음향은 DTS HD MA 2.0 채널을 지원한다.

부록으로 임권택 감독과 정성일 평론가의 음성해설, 제작과정이 들어 있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영화는 여순반란 사건부터 시작된다. 임 감독은 조정래 작가를 만난 뒤 영화화 결심을 했다고 한다.
임 감독에 따르면 당시 문화공보부는 이 작품의 영화화 소식을 듣고 아직 시기상조라며 만들지 말라고 압박했다. 문공부는 만약 영화화 할 경우 모든 공권력을 동원해 제작을 막겠다는 강경 통보를 했다.
정하섭을 연기한 신현준. 연기와 대사처리에 아쉬움이 남는다.
임 감독은 정부의 압박 때문에 영화 제작을 1년 미뤘다. 당시 노태우 정권이 1년 뒤 바뀌면 영화로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그 사이에 '서편제'를 찍었다.
정일성 촬영감독은 깊이 있는 영상으로 안개 자욱한 벌교 마을 풍경을 잘 담아냈다.
임 감독은 원작 소설의 내용이 많이 생략되고 이야기 전개가 빠른 것에 대해 "관객이 미처 따라가기 힘들만큼 빠르게 진행됐다"며 인정하고 "그 시대를 살아서 그런지 이만하면 충분하겠다고 생각해 속도를 냈다"고 설명했다.
특히 임 감독은 "너무 방대한 이야기를 2시간 안에 수용하려다 보니 빨리 진행됐다"고 해명했다. 처음부터 3시간 남짓한 시간에 10권짜리 대하소설을 담는게 무리였다.
임 감독은 벌교에서 떨어진 장성에서 자랐다. 그의 조부는 지주였으나 아버지는 빨치산 출신의 좌익이었다. 집안 사람들이 대부분 좌익이어서 가족들이 많은 고초를 겪었다.
임 감독은 원작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로 김갑수가 연기한 염상구를 꼽았다. 당시 저열하고 비겁하게 사는 인간들이 많았는데 그는 그렇게 선하거나 악하지도 않은 솔직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제작진은 촬영 현장에 경찰관이 나와서 지켜보는 등 정부의 압박으로 심적 부담을 많이 느꼈다. 임 감독은 "어찌나 압박이 심하던지 이 영화에 정나미가 떨어졌다"고 표현했다.
조정래의 원작 소설은 남북으로 갈린 민족의 비극이라는 주제를 형제의 갈등을 통해 잘 표현했다.
영화 속에서 가장 큰 비극을 겪는 인물은 여씨 형제의 어머니다. 좌익이 득세하면 극우인 동생 염상구를 걱정하고, 우익이 권력을 잡으면 빨치산인 형 염상진 때문에 마음을 졸여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어느 세상에서도 마음 편히 살 수 없는 셈이다.
임 감독은 "빨치산들의 생활을 영상으로 옮기는 것에 자신이 없어서 많이 다루지 않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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