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볼 만한 DVD / 블루레이

2046(블루레이)

울프팩 2021. 5. 14. 02:44

왕가위나 김기덕 감독은 다른 감독의 작품들보다 그들의 전작들과 종종 비교되는 감독들이다.
그만큼 다른 감독들과 비교하기 힘든 독특한 색깔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왕가위의 최근작 '2046'(2004년)도 마찬가지다.
엇갈린 사랑의 운명을 얘기하는 이 작품은 흔히 '화양연화'의 후속편으로 알려졌다.

정작 왕감독은 "화양연화의 에피소드를 포함하고 있을 뿐 후속편은 아니다"라고 설명했지만 화면 곳곳에 '화양연화' 분위기가 강하게 남아있다.
그러나 장고 끝에 악수둔다고, 5년 동안 홍콩, 중국, 태국, 마카오 등을 돌며 만든 이 작품은 산만한 구성 탓에 '화양연화'만큼 안타까운 사랑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지는 못했다.

국내의 경우 2004년 10월에 2주동안 개봉했으나 관객 동원 14만6,000명에 그쳤다.
그렇지만 왕감독과 크리스토퍼 도일 촬영감독이 빚은 영상은 더 할 수 없이 멋있다.

그의 영상은 탁월한 감각으로 옷 잘 입는 사람의 세련된 패션을 보는 듯하다.
스타일리시한 영상에 관심이 있다면 그의 작품은 좋은 교과서가 될 듯 싶다.

블루레이 타이틀 뒷표지에는 1.78 대 1로 표시됐지만, 실제 내용물은 1080p 풀HD의 2.35 대 1 와이드스크린을 지원한다.
원래 이 작품은 왕가위 감독이 와이드스크린 포맷과 애너모픽 렌즈를 처음 사용한 작품이어서 2.35 대 1 포맷이 맞다.

화질은 DVD 타이틀보다는 좋지만 블루레이 타이틀 치고는 아쉬움이 남는다.
윤곽선이 보이고 미세한 지글거림이 나타난다.

특히 DLP 프로젝터에서는 상관없지만 PC모니터로 보면 지글거림이 심하게 나타나고 플리커링도 보인다.
과거 국내에 출시된 3장짜리 DVD LE판은 일부 장면에서 한글자막 설정을 하면 하얗게 변하는 오류가 있었는데, 다행히 블루레이 타이틀은 그런 오류가 없다.

음향은 DTS-HD 5.1 채널을 지원하며 가슴 저린 시게루 우메바야시의 음악을 서라운드 채널로 잘 전달한다.
부록은 전혀 없다.

DVD LE 판에 수록된 제작과정이라도 넣어줬으면 좋았을텐데 아쉽다.
<블루레이 타이틀에서 순간 포착한 장면들>

"사랑은 타이밍이다. 아무리 사랑해도 인연은 엇갈릴 수 있다."
'2046'은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다. 갖가지 사랑이 스쳐가는 호텔의 2046호실을 가리키면서 극중 양조위가 쓴 소설 제목이기도 하다. 따라서 영화속 이야기의 한 축은 양조위의 소설을 따라간다.
한 쌍의 남녀이야기를 따라간 '화양연화'와 달리 이 작품은 다양한 사랑의 에피소드가 나열된다. 집안의 반대가 극심한 중국 여자를 사랑하는 일본 청년을 연기한 기무라 타쿠야.
왕가위 감독의 탁월한 선곡 능력이 여기서도 빛을 발한다. 시게루 우메바야시의 오리지널 스코어를 비롯해 시크릿가든의 'adagio', 벨리니의 오페라 등이 적재 적소에 등장하며 가슴을 저리게 한다.
왕감독이 '화양연화'와 다른 분위기를 요구해 콧수염을 붙인 양조위.
크리스토퍼 도일의 카메라는 은밀하게 움직인다. 마치 숨여서 엿보는 사람의 시선같은 그의 카메라는 창틀 뒤, 문 옆, 복도 끝 등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슬쩍 훔쳐본다.
이 작품이 인상적인 것은 지금은 사라진 손편지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마치 1960, 70년대 사랑처럼 편지를 쓸 누군가가 있고, 그것을 누군가 읽어준다는 사실이 가슴을 설레게 한다.
공리, 장쯔이 등 이 작품속 여인들은 가슴아픈 사랑을 한다. 시게루 우메바야시 음악과 함께 가슴을 아리게 만들었던 장면.
"나는 당신에게 어떤 존재입니까. 비 온 뒤 하늘에 걸린 무지개같은 존재인가요. 아니면 무지개는 오래 전 사라진 건가요." 문학청년 같은 왕가위의 섬세한 서정을 느끼게 하는 편지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