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갈보 콩

울프팩 2010. 8. 20. 17:30
나는 입말이 살아 있는 글을 좋아한다.
김유정, 채만식, 이순원처럼 입말을 잘 살린 작가들의 글은 편안하고 구수하다.

그렇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시백도 마찬가지다.
그가 최근 펴낸 단편 소설집 '갈보콩'은 어찌나 능청스럽게 지방 사투리를 구사했는 지 마치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워낭소리' '두물머리' '충청도 아줌마' 등 함께 묶어놓은 11편의 이야기들은 농촌의 현실을 질퍽한 입담으로 모질게 쏟아놓았다.
농사꾼들이 옮기기도 쉽지 않은 사투리로 이죽거리며 풀어놓는 이야기는 절로 웃음이 나올 만큼 재미있다.

단순히 재미있는 것 뿐만 아니라 그 속에 뼈가 있다.
한미FTA, 개발사업에 희비가 엇갈리는 농촌의 현실을 길지 않은 이야기로 알맹이만 콕 찍어 재미있게 버무렸으니, 작가의 글 재주가 놀랍다.

특히 압권은 책 제목인 '갈보콩'.
손두부 집이 잘된다길래 유기농으로 열심히 콩 농사를 지어 두부를 만들어 팔지만 손님이 점점 줄어든다.

이유는 콩 맛이 변했다는 것.
토종 콩을 심었는데 왜 맛이 변했을까.

알고보니 벌, 나비가 옆집 밭에서 수입 GMO콩의 꽃가루를 묻혀다 나르는 바람에 그만 잡종 콩이 돼버린 것이다.
농꾼은 그만 화가 나 토종 콩을 졸지에 잡종으로 만들어 버린 옆집 수입 콩밭으로 달려가 씨근덕거리며 "씨두 모를 갈보 콩"에 낫질을 해댄다.

엄혹한 농촌의 현실을 이처럼 해학적으로 풀어낸 글이 흔치 않다.
그런 점에서 이시백이라는 작가를 눈여겨 볼 만 하다.

무엇보다 온통 영어와 한문으로 오염된 세상 속에서 꿋꿋하게 우리 입말을 잘 살린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말이 살아야 정신이 살고 그래야 삶이 바로 선다.

강력 추천하는 이 작품 말미에 붙인 이시백의 '작가의 말' 중 한 토막이 이 책을 가늠하는데 도움이 되기에 옮겨본다.

"미처 글로 옮길 틈도 없이 쏟아지는 풍자거리를 내어주는 시절에 감사해야 할 지경이다. 글 쓰는 이로선 심히 고마운 일이지만 반상의 구별이 자심하여 눌려 지내던 천것들이 마당판에서 흥얼거리던 시절도 아닌 터에 녹슨 풍자의 보습을 꺼내 들고 감연히 나서자니, 어째서 대명천지 국격 높은 세상이 이리도 삐딱하니 풍자할 이야기들을 많이 쏟아내는 지 의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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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보 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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