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볼 만한 DVD / 블루레이

게이샤의 추억

울프팩 2006. 5. 31. 19:08

몇 년 전 교토를 갔을 때였다.
현지 가이드가 일본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전통적인 게이샤 집을 안내했다.

일행들은 커다란 다다미방에서 작은 상을 각각 앞에 놓고 앉아서 기다렸다.
잠시후 아주 어려서부터 전수 교육을 받은 게이샤들이 화려한 기모노를 입고 들어왔다.

중국 경극분장처럼 얼굴을 하얗게 화장한 게이샤들이 각각 상 앞에 마주 앉아서 저녁 수발을 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참으로 민망하게도, 우리 앞에 나타난 게이샤들은 영화나 책에서 보고 읽은 아리따운 여성들이 아니었다.

거의 어머니뻘은 될 만한 아주 나이가 많은 여성들이었다.
그들이 술을 따라주는게 미안해서 받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나이가 많아 보였다.

그렇게 수발을 들던 게이샤들은 잠시 후 샤미센이라는 기타 비슷한 일본의 전통 악기를 연주하며 춤을 추었다.
저녁 시간이 어찌 흘러갔는 지 모를 만큼 황망한 순간이 지나고 일어서서 나오는데 1층 문 앞까지 따라나온 게이샤가 무엇인가 작은 종이를 건넸다.

폭 1~2센티 남짓한 손가락 두 마디 길이의 붉은 색 테두리를 가진 스티카 같은 종이였다.
가운데 4글자의 한문이 적힌 종이였는데,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바로 게이샤의 명함이란다.

가이드 말로는 아무에게나 안주는 귀한 물건이니 고히 간직하란다.
그 말을 순진하게 곧이 듣고는 한 동안 갖고다니며 사람들에게 보여준 기억이 있다.
그게 내가 가진 게이샤에 대한 추억이다.

'시카고'를 만든 감독 롭 마샬의 영화 '게이샤의 추억'은 1920~40년대 살았던 일본 게이샤들의 이야기다.
아더 골든의 원작을 토대로 옮긴 이 작품은 바닷가 어촌에서 하녀로 팔려간 소녀가 게이샤가 돼서 한 남자를 가슴에 품은 채 살아가야 하는 안타까운 사랑을 그렸다.

사실 게이샤들의 세계를 잘 모르는데다가 일본에 대한 정서가 우호적이지 않다보니 이야기는 쉽게 공감하기 힘들지만 볼거리만큼은 화려한 작품이다.
롭 마샬 감독이 색과 빛, 배우들의 움직임을 중요하게 여기는 감독인지라 영화속 의상, 조명, 풍경 등이 더 할 수 없이 화려하고 서정적이다.

내용보다는 아름다운 영상을 눈여겨본다면 그런대로 볼 만한 작품이다.
다만 중국 배우들이 영어를 써가며 게이샤를 연기한 것이 어째 영 어색하다.
연기를 못해서가 아니라 할리우드 배우들이 갓 쓰고 사극을 찍은 모습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2.40 대 1 애너모픽 와이드 스크린을 지원하는 DVD 화질은 괜찮다.
필름의 고운 입자감이 느껴지는 영상은 잡티, 스크래치, 링잉 등이 일체 없으며 은은하고 고운 발색의 색감이 좋다.

돌비디지털 5.1 채널을 지원하는 음향 역시 서라운드 효과가 좋다.
파도와 바람소리 등을 들어보면 소리 이동성과 방향감이 여실히 살아 있다.
다만 더러 보이는 한글 자막의 오자가 옥의 티.

<파워 DVD 캡처 샷>

이 영화는 '라스트 사무라이'처럼 서양인이 막연하게 동경하는 오리엔탈리즘이 스며있다. 그만큼 정서의 깊이보다는 겉핥기식 눈요기로 가득하다. 그래서 중요한 게이샤 역할도 정서적 공감대를 갖고 있지 않은 중국 여배우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기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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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도 마찬가지다. 일본으로 등장하는 장소 곳곳이 사실은 모두 미국이다. 이 장면의 기차역도 미국 새크라멘토 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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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속 배경이 되는 게이샤 마을 역시 LA 벤추라 카운티에 만든 거대한 세트다. 무려 13Km에 이르는 이 세트에는 76m 길이의 인공 개천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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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인상깊었던 장면. 주황색 기둥이 무려 5km에 걸쳐 늘어선 이 곳은 후시미 이나리 신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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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게이샤인 사유리를 연기한 장쯔이. 그의 스승 게이샤 역을 맡은 양자경. 양자경은 런던왕립발레학교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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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중 질투의 화신으로 등장하는 게이샤 하츠모모 역의 공리. 참으로 열정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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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리의 대모로 등장하는 모모이 가오리(오른쪽)는 일본의 메릴 스트립으로 불리는 배우다. 그 옆에 앉은 중국 배우 채천은 '조이럭클럽'에 출연했고 '007 두번산다'에서 본드걸로 등장한다. 그러고보니 이 영화에는 '007 네버다이'에 나온 양자경 등 2명의 본드걸이 출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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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리의 데뷔무대가 된 곳은 LA에 위치한 벨라스코 극장이다. 찰리 채플린의 작품이 미국에서 처음 상영된 곳이다.
게이샤를 몸을 파는 창녀와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예인(藝人)이라는 단어가 말해주듯 전통 춤과 악기 연주를 배워 공연하는 일본의 전통 연예인이다. 게이샤와 창녀는 화장으로 구분했다. 창녀들은 턱 위로 화장을 하지 않는다. 영화속에서 창녀가 된 사유리의 언니 화장을 보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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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20센티에 이르는 신발을 신고 데뷔 공연을 하는 주인공 사유리. 게이샤 역을 맡은 배우들은 모두 일본 게이샤 교습소에서 한 달간 훈련을 받았다. 특히 논문을 쓰기 위해 서양인 가운데 최초로 일본에서 게이샤가 된 라이자 달비가 이들의 자문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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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이 만발한 이곳 역시 LA의 헌팅턴 가든이다. 벚꽃은 조립식으로 만든 인조 나무다. 영화속에서 흩날리는 벚꽃잎 역시 장미잎을 잘게 잘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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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많은 후견인들을 상대로 경매에 붙여 게이샤의 처녀성을 파는 장면. 극중 사유리의 처녀성을 산 부유한 의사 역할은 한국계 미국배우인 김 랜달 덕이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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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에 사로잡힌 하츠모모가 사유리가 몰래 간직한 마음 속 연인의 손수건을 태우다 싸움이 나는 장면은 원작에 없는 영화만의 창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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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은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영상을 위해 제작진은 무려 3만평의 세트를 천장처럼 실크로 뒤덮어 캘리포니아의 강한 햇살을 차단하고 촬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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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발발후 사유리가 피한 기모노 제작공장 역시 미국 새크라멘토의 아메리카강에서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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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의 손수건을 허공에 날리며 마음을 정리하는 사유리를 잡은 절경은 미국 북캘리포니아의 무어비치에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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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및 뮤지컬배우였던 롭 마샬 감독은 연극배우 출신답게 대사처리를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배우들의 영어 발음에 무척 공을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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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비친 기모노를 이용한 엔딩크레딧 또한 인상적이다. 존 윌리엄스가 맡은 음악도 좋다. 요요마와 이차크 펄만이 각각 첼로와 바이얼린 연주를 맡았는데, 첼로는 사유리의 목소리를, 바이얼린은 와타나베 켄이 연기한 회장 목소리를 대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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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에 처음 등장한 게이샤는 남자들이었다. 이들은 영주의 술자리에 참석해 사미센을 연주하고 시를 읊으며 흥을 돋궜다. 여자로 바뀐 것은 그로부터 100년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