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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DVD / 블루레이

엘 토포

울프팩 2008. 7. 24. 18:54

서부극 가운데 좌파적 색채를 띄고 있는 대표적 작품이 두 편 있다.
세르지오 레오네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와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의 '엘 토포'(El Topo, 1971년)다.
막시스트들이 여럿 참여한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는 그렇다쳐도, '엘 토포'를 좌파 영화로 분류하면 스스로 좌파를 표방한 적 없는 조도로프스키 감독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울 수 있지만 면면히 흐르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부정적 시각과 이로부터 벗어나기를 갈구한 영상은 지극히 사회주의적이다.

재미있는 것은 조도로프스키 특유의 스타일로 성서를 재구성한 영상들이 사회주의 시각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좌파 서부극으로 보이는 것만큼이나 또다른 아이러니다.

사실 이 작품을 서부극으로 봐야할 지도 의문이다.
배경과 시대는 물론이고 총잡이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서부극의 외양을 갖추고 있지만 이 작품은 신을 꿈꾸는 사내의 고행을 다루고 있다.

구약 성서 속 네 명의 예언자인 이사야, 에스겔, 예레미아, 다니엘 등과 대결해 신의 위치로 오르려는 주인공은 다름아닌 예수의 모습이다.
결국 구도의 길에 오른 주인공은 복종적 희생이 아닌 분노의 폭력적 대결을 통해 억압받는 사람들을 해방하고 순교의 길에 오른다.

조도로프스키 감독의 작품이 언제나 그렇듯 영화는 메시지 만큼이나 잔혹하고 처절한 영상으로 가득하다.
아울러 그만큼 난해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 매료되는 것은 박상륭의 소설 만큼이나 웅심깊은 조도로프스키의 영상 철학이 빛나기 때문이다.

4 대 3 풀스크린을 지원하는 DVD 타이틀 화질은 제작연도를 감안하면 괜찮은 편이다.
지글거림이 보이지만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거쳤기 때문에 잡티가 난무하는 일본판 박스세트 DVD보다는 훨씬 낫다.
돌비디지털 5.1 채널을 지원하는 음향은 음량도 작고 서라운드 효과도 미미하다.

<파워DVD로 순간포착한 DVD 타이틀 장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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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인 엘 토포는 멕시코 말로 두더지라는 뜻. 조도로프스키는 이 작품에서 감독을 비롯해, 각본, 음악, 의상, 장치, 주연까지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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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뒤에 매달린 벌거벗은 소년이 바로 아들 브론티스 조도로프스키다. 그는 18년 뒤 '성스러운 피'에 다시 출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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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에 다가가는 조도로프스키의 접근법은 직접적이고 충격적이다. 이 장면에서 어린아이와 여자들만 무고한 죽음을 상징하는 흰 옷을 입고 있다. 남자들은 모두 색깔 옷을 입고 목이 매달린 채 죽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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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서부극 '더 데이 오브 이블건'의 버려진 세트 위에서 수일 동안 촬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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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색을 상징하는 은유적 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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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컬트 영화 대접을 받는 이 작품에 매료된 대표적 인물이 바로 비틀즈의 멤버 존 레논이다. 그는 이 작품을 보고 열광한 나머지 매니저 앨런 클라인을 통해 조도로프스키 작품의 모든 판권을 사들인다. 그러나 존 레논의 호의에서 시작된 일이 뜻하지 않은 악연으로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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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클라인이 조도로프스키에게 에로 영화 촬영을 종용하자, 조도로프스키 감독은 계약 청산 의사를 비친다. 이에 화가 난 앨런 클라인은 30년 동안 '엘 토포'와 '홀리 마운틴'의 상영을 철저히 틀어 막았다. 결국 두 작품으로 한 푼도 벌지 못한 조도로프스키는 세상에 작품을 알려야 겠다는 생각에 작품을 비디오테이프로 복사해 무료로 돌리고 인터넷으로 배포한다. 감독이 스스로 해적행위를 한 셈. 앨런 클라인의 횡포로 시작된 판권 분쟁은 30년이 지난 2002년에 종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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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 역시 기형적 신체를 지닌 장애인들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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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를 사기극으로 봤던 조도로프스키 작품답게 주인공은 속임수로 현자들을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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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를 상징하는 메타포. '홀리 마운틴'에서도 양의 시체를 앞세운 군대의 십자가 행렬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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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를 러시안 룰렛에 비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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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과 위선을 가장한 지도층은 지하에서 온갖 추문과 낯부끄러운 짓을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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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고행 끝에 해방시킨 불구자들은 자신의 부모들을 찾아 마을로 내려오다 마을 사람들의 총을 맞고 모두 죽는다. 결국 직접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종교적 구원이란 또다른 희생양을 낳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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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신이 되고자 했던 주인공은 해방신학의 사제들처럼 분노의 총을 집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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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의 구도의 끝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등신불이다. 동양의 철학이나 불교에 관심이 없다는 조도로프스키는 본인이 의도했던 아니던간에 뜻밖에 불교적 해탈을 답으로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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