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영화

워낭소리

울프팩 2009. 2. 7. 15:44
어렸을 때 시골 할아버지댁에서 잠시 자랐던 적이 있다.
빛도 들지 않던 신새벽, 코 끝이 싸한 산골의 아침 공기보다 먼저 잠을 깨우는 것은 구수한 쇠죽 끓이는 냄새였다.

볏집과 야채를 숭덩숭덩 썰어넣고 커다란 가마솥에 끓여내던 쇠죽 내음은 어찌나 구수하던 지,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냄새와 더불어 외양간에 매여있던 소가 밥 때를 알고 긴 울음을 울면, 그제사 눈을 비비고 문 밖을 내다봤다.

이충렬 감독의 다큐멘터리 '워낭소리'는 어린 시절 맡았던 쇠죽 냄새 같은 영화다.
등굽은 여든 노인네와 죽을 날을 기다리는 마흔 살 소의 힘겨운 발 걸음 속에는 우리가 잊고 지낸 과거의 고단한 삶이 배어 있다.

투박한 농부의 손과 발굽이 다 닳아 버려 걸음조차 제대로 옮겨놓지 못하는 소를 보면서, 이제는 기억조차 바래어버린 옛날을 떠올리게 된다.
돌아보면 하루 하루 삶에 쫓겨 정겨웠던 것들을 너무 많이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소 목에 매달려 울리던 워낭 소리도 그렇고, 코뚜레 뚫린 소의 선하디 선한 눈망울, 꼴 지게를 지고 내려오던 할아버지의 모습 등 이제는 애써 찾아야 하는 기억 속 편린들이 영화 보는 내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각박한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한때나마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비록 극영화처럼 재미있거나 요란하지는 않아도 삶의 위대함과 금수와도 나눌 수 있는 순수하고 말 없는 정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특히 시골 생활에 대한 기억과 향수를 갖고 있다면 그 감동은 더욱 배가 된다.

2년 여가 넘는 시간을 공들여 촬영하고 잘 다듬은 편집 덕분에 다큐멘터리인데도 불구하고 극영화같은 스토리를 갖고 있다.
어찌보면 그 부분이 다소 작위적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이야기 흐름을 편하게 쫓아갈 수 있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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