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축구, 그 빛과 그림자

울프팩 2011. 2. 11. 17:20
콘솔 게임 가운데 물리지 않고 즐기는 게임이 2가지가 있다.
바로 축구게임 '위닝 일레븐'과 미식축구게임 '메이든 NFL'이다.

두 가지 모두 축구게임인데, 하나는 발을 주로 쓰고, 하나는 손을 주로 쓰는 점이 다르다.
실제로는 잘 하지 못하니 게임으로 대신 하는데, 분신을 만들어 즐기는 재미가 쏠쏠하다.

미식축구는 국내 팬이 많지 않지만, 축구는 온 국민의 스포츠다.
60,70년대부터 국가대항전 등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을 단결시키는데 그 만한 운동이 없었다.

### 축구의 기원 - 발로 찬 드로잉 ###

사실 축구는 서양에서 건너온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중국이 기원이다.
약 5,000년 전 중국 사람들은 발로 공을 땅에 떨어뜨리지 않는 운동을 즐겼다.
송나라를 배경으로 한 '수호지'에도 고구가 축구를 즐긴 기록이 나온다.

기원전 5세기의 고대 이집트나 그리스, 멕시코나 중미에서도 축구와 비슷한 경기를 했다.
로마인들도 마찬가지로 축구를 즐겼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이후 영국을 정벌한 로마인들 덕분에 축구는 영국까지 건너갔다.
당시 축구는 시간과 인원, 공간 제한 없이 서로 격투를 벌이며 공을 몰고 다니는 바람에 사람이 숱하게 죽어나가 영국 왕 에드워드3세는 1349년에 법으로 금지를 시켰다.

축구가 요즘과 비슷한 형태를 갖춘 것은 1846년 케임브리지대학이 공을 손으로 들고 가지 못하는 규칙을 만든 이후다.
그러나 여전히 선수 숫자, 경기 시간, 축구장 크기 등은 제한이 없었다.

이후 1863년에 12개의 클럽이 협정을 맺으면서 프로축구의 틀을 갖췄다.
11명의 선수로 정해진 것은 1870년. 이때 수비수, 공격수 등의 포지션이 정해졌다.

골키퍼가 등장한 것은 1871년이다.
이때부터 골키퍼만 손의 사용을 허용했다.

당시에는 드로잉도 발로 찼다.
드로잉을 손으로 할 수 있게 된 것은 1882년 이후다.

그러나 골키퍼가 있어도 슛을 막기는 쉽지 않았다.
골대 높이가 무려 2층집 만한 5.5 미터였기 때문.

1872년에 경기장 밖에서 심판을 보는 주심이 처음 등장했고, 1880년부터 주심이 경기 종료 시간을 결정할 수 있게 됐다.
1891년에는 주심이 경기장 안에 들어갈 수 있게 됐고, 페널티 킥이 등장했다.
1890년부터 석회가루를 뿌려서 경기장에 선을 그렸고, 1904년에 국제축구연맹(FIFA)이 등장했다.

때론 국민의 자존심이 걸린 축구에 목숨을 걸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때 독일 점령 하에서 히틀러의 대표팀과 경기를 치른 우크라이나의 키에프팀은 경기에 져야만 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당당히 경기에 승리한 뒤 선수복을 입은 채 모두 사형당했다.

### 월드컵의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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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하는 축구를 더 좋아하는 미국이 월드컵에서 거둔 최고 성적은 3위다.
1930년 우루과이에서 열린 제 1회 월드컵에서 미국은 유고슬라비아를 꺾고 3위에 올랐다.
당시 미국 대표팀은 귀화한 스코틀랜드 선수들이 주전이었다.

1938년 프랑스 월드컵의 득점왕은 3위 브라질팀의 레오니다스였다.
흑인이었던 그는 폴란드 전에서 폭우가 쏟아져 경기장이 진흙탕으로 변해버리는 바람에 축구화를 잃어버려 맨 발로 뛰었고, 골까지 넣었다.
그는 대회 기간 총 8골로 득점왕에 올랐다.

1938년 월드컵에서 이탈리아와 브라질이 치른 준결승전은 코미디였다.
페널티킥 주자로 나선 이탈리아팀의 메아차가 공을 차려고 달려가는 순간 바지가 흘러 내렸고, 골키퍼가 웃음을 터뜨린 사이 바지를 움켜쥔 채 공을 차서 골을 넣었다.
그 골이 브라질을 격침시켰다.

### 축구 황제 펠레의 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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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종주국처럼 꼽히는 영국이 월드컵에 처음 나간 것은 1950년 브라질대회였다.
한국전쟁 발발 전날인 6월24일에 열린 이 대회에는 유럽 6개국, 미주 7개국이 참가했고, 2차 세계대전의 주범인 독일은 피파로부터 출전 금지를 당했다.

1958년 스웨덴 월드컵은 브라질팀의 17세 흑인 소년 펠레를 축구황제로 알린 대회였다.
브라질은 그 대회에서 6골을 몰아친 펠레와 가린샤 덕분에 우승했다.

58년 월드컵에서 브라질 우승의 주역 중 하나였던 가린샤는 어린 시절 소아마비에 척추가 S자로 휘고, 두 다리가 한쪽으로 휘어서 축구를 할 수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그럼에고 그라운드에 나선 그는 58년, 62년 등 2년 연속 월드컵대회 최우수선수로 뽑혔다.
그러나 말년에는 가난 속에서 알코올 중독으로 비참하게 숨을 거두었다.

### 북한의 월드컵 출전, 그리고 이탈리아 격파 ###

1962년 칠레 월드컵은 스타들의 무덤이었다.
'금발의 화살' 디 스테파노는 복사뼈를 다쳐 월드컵에 한 번도 서보지 못하고 은퇴했고, 펠레는 근육파열상으로 벤치를 지켰다.

'거미손'으로 불린 세계 최고의 골키퍼 러시아의 야신은 콜롬비아전에서 무려 4골이나 먹으며 침몰했다.
야신이 유명했던 것은 25년간 무려 100개가 넘는 페널티킥을 막아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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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년 월드컵은 브라질이 우승했는데 가린샤 덕분이었다.
이 대회의 결승전은 최초의 TV 생중계로 방송됐다.

사상 최초로 전 대회가 TV 생중계된 것은 가린샤의 마지막 무대였던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이었다.
북한은 처음 출전한 이 대회에서 박두익의 골로 이탈리아를 꺾었다.
이 대회에서 미드필드의 황제 '카이저'로 통하던 베켄바우어, 포르투갈팀에서 뛴 '아프리카의 검은표범' 에우제비오가 명성을 날렸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은 펠레와 베켄바우어가 활약하는 가운데 '그라운드의 어뢰'인 서독팀의 뮐러가 10골을 넣으며 득점왕이 됐고, 브라질의 자일징요가 7골로 뒤를 이었다.
이 대회 우승국인 브라질은 3차례 우승으로 줄리메컵을 영구 소장하게 됐다.
그러나 이 컵은 83년에 도난당해 금덩어리로 녹은 채 매매됐다.

### 요한 크루이프와 베켄바우어의 대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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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독일 월드컵은 요한 크루이프를 위한 무대였다.
전원 수비, 전원 공격이라는 토탈 사커를 선보인 네델란드팀은 요한 크루이프의 지휘 아래 연전연승했으나 결승전에서 '카이저' 베켄바우어와 '어뢰' 밀러가 버틴 독일팀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연약한 체질이었던 크루이프는 아약스클럽에서 볼보이와 선수들의 축구화를 닦는 일로 운동을 시작했다.
독일의 득점 머신 게르트 뮐러도 축구 선수로 대성하기 힘들다는 소리를 듣고 하루 12시간씩 섬유공장에서 일을 했다.
그런 그들이 부단한 노력 끝에 74년 월드컵에서 자국 대표팀을 이끌었다.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는 프랑스의 미셀 플라티니와 독일의 루메니게가 주목을 받았다.
심장기능과 기관지 허약, 골절 가능성이 높은 복사뼈 등의 진단으로 프로팀 입단을 거절당했던 플라티니는 프랑스팀을 이끌고 독일과 준결승에서 격돌했으나, 승부차기에서 졌다.

### 마라도나와의 악연 ###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은 한국이 출전한 덕분에 내가 최초로 TV 생중계를 본 대회였다.
아니, 나 뿐만 아니라 당시 국민들은 새벽에 일어나 월드컵 대회 생중계를 처음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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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대회에서 '신의 손'으로 등극한 마라도나의 신기에 가까운 발놀림을 볼 수 있었고, 운 나쁘게도 그가 버틴 아르헨티나팀과 붙은 우리는 보기에도 안스러울 정도로 고생했다.
마라도나 전담 마크맨이었던 허정무의 과격한 태클 때문에 태권 축구라는 소리까지 들었지만, 그를 막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마라도나는 이후 약물 사용으로 선수생활을 끝내야 했고, 코카인을 복용해 마라코카라는 놀림을 받기도 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우루과이의 진보적 지식인이자 언론인 에두아르도 갈레아노가 쓴 축구 관련 칼럼집 '축구, 그 빛과 그림자'에 소개된 내용이다.
갈레아노는 이 책에서 특유의 은유와 촌철살인으로 무장한 글들로 축구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다.
편하게 읽어볼 만 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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