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고레에다 히로카즈 7

태풍이 지나가고(블루레이)

고레에다 히로카즈(是枝裕和) 감독의 영화는 잔잔한 일상을 통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태풍이 지나가고'(海よりもまだ深く, 2016년)도 그런 영화다. 유명 작가를 꿈꾸며 사립 탐정사무소에서 일하는 료타(아베 히로시 阿部寛)가 태풍이 닥친 날 어머니(키키 키린 樹木希林)의 집에서 헤어진 아내(마키 요코 真木よう子), 아들과 함께 보내며 일어나는 일상을 다뤘다. 료타는 한때 촉망받는 작가였지만 도박으로 돈을 날리면서 결국 아내와 이혼하고 탐정 일을 하는 친구(릴리 프랭키 Lily Franky) 사무소에서 보조로 근근이 먹고사는 처지다. 마침 어머니의 집에 들렀다가 태풍을 만나면서 료타는 무엇이 잘못됐는지 되짚어 보게 된다. 이 작품에는 경제적으로 무능한 남자들이 등장한다. 주인공 료타는 도박으로 재..

10년(블루레이)

일본을 오래 연구한 학자인 터프츠대학교의 수전 네이피어 교수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을 다룬 '미야자키 월드'라는 책에서 일본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네 가지를 두려워한다고 썼다. 천둥, 불, 지진, 아버지다. 이 중에서 아버지는 전통적인 가부장제로 대표되는 권위적인 남성 중심 문화를 말한다.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외부적 요소다. 그만큼 일본 사람들은 잦은 지진과 여름이면 천둥 번개를 동반한 태풍에 시달리며 자연재해에 대한 두려움이 커졌다. 여기에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도시를 송두리째 태우는 폭격과 원자폭탄이라는 끔찍한 경험을 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총괄 프로듀서를 맡은 영화 '10년'(十年, 2018년)은 일본인들이 갖고 있는 네 가지 공포를 ..

세 번째 살인(블루레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세 번째 살인'(三度目の殺人, 2017년)은 특이한 영화다. 고용주를 죽여 체포된 중년의 공장 노동자 미스미(야쿠쇼 코지)가 형량을 낮추기 위해 사건을 조사하는 변호사들에게 끊임없이 말을 바꾸며 사건을 오리무중에 빠트린다. 마치 일부러 죽으려고 작정한 것처럼 미스미는 유리한 증거나 증언이 나오면 이를 뒤집는다. 심지어 살해된 사장의 딸 사키에(히로세 스즈)가 결정적인 증언을 하겠다며 나서지만 미스미는 이 조차도 거부한다. 이쯤 되면 변호사 시게모리(후쿠야마 마사하루) 뿐만 아니라 관객들도 헷갈린다. 도대체 사건의 진실은 무엇인가. 영화 속에 진실은 없고 팩트, 즉 사실만 있다. 팩트는 미스미가 사장을 죽였다는 것. 사실은 현상을 보여줄 뿐이다. 현상 뒤에 숨은 의미를 알려면 진..

어느 가족(블루레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万引き家族, 2018년)은 가족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다. 내용은 연금을 받는 어느 할머니를 중심으로 뭉친 희한한 도둑놈 가족 이야기다. 구성원들은 모두 피를 나눈 사람들이 아니다. 각자 사연을 지닌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도둑질로 하루하루를 연명한다. 하지만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고 겉모습만 보면 더할 수 없이 따뜻하고 화목한 가정이다. 비록 어린아이부터 할머니까지 좀도둑질을 하고 성인업소에서 일을 하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친가족 이상의 끈끈한 정을 갖고 살아간다. 그런 어느날 이들은 뜻하지 않게 합류한 여자아이 때문에 졸지에 유괴범으로 몰릴 처지에 놓였다. 하지만 여자아이는 오히려 학대하고 방치하는 친부모보다 낯선 이들에게 따뜻함을 느낀..

걸어도 걸어도(블루레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걸어도 걸어도'에 얽힌 추억이 하나 있다. 일본의 배우 겸 가수였던 이시다 아유미가 부른 '블루라이트 요코하마'라는 노래다. 노랫말 발음대로라면 '부루라이또 요꼬하마'다. 일본 노래가 금지된 1980대 초반 이 노래와 콘도 마사히코의 '긴기라기니'가 국내에서도 엄청 인기였다. 일본 노래 자체가 금지된 시절 이 노래들은 서울의 이태원이나 세운상가 등지에서 판매한 '일본 노래 모음'이라는 카세트 테이프에 들어 있었다. 금지곡에 대한 호기심과 친구들을 통해 들어본 멜로디에 반해 이 테이프를 사서 열심히 들었던 기억이 난다. 특히 블루라이트 요코하마는 애잔한 엔카풍 노래였는데 멜로디에 반해서 여러번 듣다보니 뜻도 모르며 가사를 따라 부르게 됐다. 영화 속에서 이 노래가 나와 놀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