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이강산 4

박하사탕 (블루레이)

영화가 시작되고 나서 얼마 후, 철로 위에 올라 선 설경구의 얼굴이 스크린을 가득 메우며 달려오는 기차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나 다시 돌아갈래"라고 외치는 충격적인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의 인상이 어찌나 강렬하던 지,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1999년) 하면 우선 떠오른다. '초록 물고기'로 감독 데뷔한 이창동 감독이 두 번째로 만든 이 영화는 설경구가 연기한 영호라는 인물이 겪은 20년을 다루고 있다. 1979년부터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1999년까지 현대사의 가장 아픈 부분이 한 인물의 기억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를 위해 각본을 직접 쓴 이 감독은 영호의 죽음부터 과거로 시간을 되짚어 올라가는 플래시백 기법을 사용했다. 시간을 거꾸로 올라가는 방식이 처음 나온 것은 아니지만, 이..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블루레이)

2004년 홍상수 감독의 영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언론 시사회 때 참석했던 기억이 난다. 그의 영화가 언제나 그렇듯 느닷없이 끝나는 결말에, 뒷줄에서 황당하다는 듯 웃음이 터졌다. 황당함은 기자간담회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나서도 계속 됐다. 여자가 남자의 미래인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홍 감독 왈, "제목은 내용과 상관없다. 어느 날 이 문장을 봤는데 끌려서 붙였다. 제목은 문장일 뿐"이라고 답했다. 그래서 이것은 좀 아니다, 무책임하다는 생각에 혹독하게 기사로 깠다. 한편으로는, 이전에 본 서너 편의 작품과 동어반복처럼 되풀이 되는 그만의 스타일이 좀 게을러 보이는 측면도 있었다. 그때는 그런 점들이 홍 감독 영화의 단점으로 보였는데, 시간이 지나서 여러 편 보다보니 그의 개성으로 부각된다. 등장..

중독

같은 날 같은 시각 다른 장소에서 형제가 나란히 자동차 사고를 당한다. 오래도록 혼수상태였던 두 사람 가운데 동생만 깨어난다. 그런데 몸은 동생인데, 생각과 행동은 형이다. 다른 사람의 몸에 영혼이 들어가는 빙의 현상이다. 주변 사람들은 혼란스럽다. 눈에 보이는 것을 부정하고, 다른 존재로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사랑이라면 더더욱 힘들다. 그러나 시동생은 자연스럽게 형수를 아내처럼 대한다. 결국, 형수는 부부끼리만의 비밀을 알고 있는 시동생을 남편의 현신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시동생은 정말 빙의일까. 이쯤되면 사랑이 아니라 광기다. 박영훈 감독의 영화 '중독'(2002년)은 등골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무서운 사랑을 보여준다. 오래전부터 마음 속으로 사랑했던 사람을 갖기 위해 꾸미는 한..

살인의 추억 (블루레이)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2003년)은 우리 영화 중에서 걸작을 몇 편 꼽으라면 꼭 들어갈 작품이다. 탄탄한 내용과 연출,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와 훌륭한 영상, 애잔한 음악까지 이토록 완벽한 작품이 있을까 싶다. 김광림의 연극 '날 보러와요'를 각색한 이 작품은 그 해 500만명을 넘기며 최다 관객을 동원했다. 내용은 1986년부터 91년까지 경기 화성에서 6년간 10명의 부녀자가 죽은 연쇄강간살인사건을 다뤘다. '화성 연쇄 살인'으로 통하는 이 사건은 결국 범인을 잡지 못하고 공소 시효를 넘겨 영구 미제 사건이 됐다. 봉 감독은 안개 속처럼 뿌연 사건의 한 가운데서 범인을 쫓는 형사들의 안타까운 심정에 초점을 맞춰 숨막히는 드라마로 그려 냈다. 어찌나 심리 묘사가 탁월한 지 절로 형사들의 심정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