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이얼 4

82년생 김지영(블루레이)

2016년 출간된 조남주 작가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페미니즘 논란을 부른 작품이다. 한 여성의 30여 년 삶을 조망한 이 작품은 이 땅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다뤘는데 이를 둘러싸고 찬반 논란이 일었다. 페미니즘 진영에서는 현실의 반영이라고 옹호한 반면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쪽에서는 지나친 과장이자 피해의식의 확대로 봤다. 이를 원작으로 한 김도영 감독의 '82년생 김지영'(2019년) 또한 이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원작을 둘러싼 논쟁이 그대로 전이돼 개봉 전부터 찬반 논란이 거세게 일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 과연 페미니즘 논란이 일만한 작품인지 의문이 든다. 영화의 소재 자체가 성평등의 한계를 지적할 만한 사회 구조적 문제보다는 한 여성의 삶에 초점을 맞춘 드라마..

와이키키 브라더스(블루레이)

임순례 감독의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년)는 보고 나면 가슴이 짠한 영화다.그토록 좋아했던 음악을 위해 노력하는 일행이 현실적인 삶의 장벽에 가로막혀 어려움을 겪는 과정을 다뤘다. 나이가 먹고 나서 다시 보니 예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이 영화를 처음 본 30대 때에는 비록 힘든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꿈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젊은이들의 패기가 보였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다시 보니 결코 패기와 용기만으로 넘기 힘든 생활의 어려움이 보인다.아마도 2001년이 IMF 이후이기는 하지만 취업이나 경쟁 상황 등 피부로 느끼는 삶의 여건이 지금보다 덜 각박했던 때문인가 보다. 비록 기술이나 물질은 지금이 그때보다 더 발전했지만 그것이 모두에게 돌아가는 혜택은 공평하지 않은 탓일 수도 있다.소위 ..

중독

같은 날 같은 시각 다른 장소에서 형제가 나란히 자동차 사고를 당한다. 오래도록 혼수상태였던 두 사람 가운데 동생만 깨어난다. 그런데 몸은 동생인데, 생각과 행동은 형이다. 다른 사람의 몸에 영혼이 들어가는 빙의 현상이다. 주변 사람들은 혼란스럽다. 눈에 보이는 것을 부정하고, 다른 존재로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사랑이라면 더더욱 힘들다. 그러나 시동생은 자연스럽게 형수를 아내처럼 대한다. 결국, 형수는 부부끼리만의 비밀을 알고 있는 시동생을 남편의 현신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시동생은 정말 빙의일까. 이쯤되면 사랑이 아니라 광기다. 박영훈 감독의 영화 '중독'(2002년)은 등골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무서운 사랑을 보여준다. 오래전부터 마음 속으로 사랑했던 사람을 갖기 위해 꾸미는 한..

홀리데이 (LE)

"88올림픽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0월의 일요일. 서울 북가좌동 주택가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 집 담장에서 지켜본 탈주범 지강헌의 최후 모습은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담배를 꼬나문 채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던 적의 가득한 눈빛, 창틀을 부여잡고 폭포처럼 쏟아내던 절규, "사랑받고 싶었다" "생명이 몇 시간 남았는 지 모르지만 따사로운 햇빛을 받고 싶다"는 등... 그리고 유리조각으로 목을 긋기 전 세상을 향해 조롱하듯 날린 섬뜩한 미소까지. 무엇보다 귓가에 선연한 것은 비지스의 팝송 '홀리데이'의 애잔한 선율이다. 지강헌은 경찰에 요구해 받은 테이프를 방안 카세트에 꽂고 한껏 볼륨을 올렸다. 그리고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따라 불렀다. 유리 조각으로 자해하고,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