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중국 23

페인티드 베일(블루레이)

사람들이 인생이라 부르는 오색 베일을 들추지 마라.(Lift not the painted veil which those who live call life) 퍼시 셀리의 시 '오색 베일을 들추지 마라'(Lift not the painted veil)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사람들은 오색으로 빛나는 베일 너머에 특별한 무엇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 걷어보지만 막상 그 뒤에 있는 것이 꼭 희망적인 것만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소설가 서머셋 모옴은 이 시와 젊어서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읽은 단테의 신곡 중 '연옥'편에 나오는 피아 이야기에 영감을 받아 소설을 구상한다. 남편은 아내 피아가 죽기를 바라며 말라리아가 무섭게 퍼지는 성에 가둔다. 그곳에서 피아는 병에 걸려 서서히 죽어 간다. 모옴은 1925년..

영웅(감독판 블루레이)

중국이 우리의 발해성벽까지 만리장성의 연장이라고 역사를 왜곡하는 장성공정을 벌여 공분을 자아낸다. 진의 시황제가 북방 오랑캐를 막기 위해 쌓은 만리장성을 처음 가봤을 때 사진이나 TV에서 본 것과 달리 얕으막한 높이에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가까이 보면 실망스런 이 건축물이 멀리 떨어져보면 우주에서도 보일 만큼 장대하다. 장예모 감독의 ‘영웅’(2002년)은 만리장성 같은 작품이다. 장 감독의 첫 액션영화인 이 작품은 단순 무협물로 보이지만 한걸음 떨어져보면 중국 역사를 꿰뚫는 기본적 흐름과 사상이 녹아 있다. 조각난 중국 대륙을 통일하려고 주변국을 침략한 진시황제를 암살하기 위해 네 명의 무사들이 주도 면밀한 계획을 세운다. 시황제에게 짓밟힌 조국을 대신해 뭉친 이들의 계획은 뜻밖에도 내부에서 ..

엽문 (블루레이)

엽문이라는 무술가가 있다는 사실은 세계적 쿵후 스타 이소룡 때문에 처음 알았다. 이소룡이 직접 만든 무술인 절권도의 근간이 되는 영춘권을 엽문에게 배웠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계기였다. 이소룡을 다룬 책 중에 비교적 잘 쓴 브루스 토마스의 '이소룡, 세계와 겨룬 영혼의 승부사'를 보면 엽문을 만나게 된 사연이 자세히 나온다. 이소룡이 엽문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윌리엄 청 덕분이다. 이소룡은 어떻게 영춘권을 배웠나 윌리엄 청은 생소한 이름이지만 영춘권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원래 영춘권은 지극히 폐쇄적인 무술이다. 영춘권의 본류는 창시자의 적통을 이어받은 직계가족 등 소수에게만 전수돼 왔다. 그 외 사람에게 가르치는 영춘권은 일부를 빼거나 변형시킨 수련용으로, 지금 여러 국가에 퍼져있는 영춘권의..

천주정 (블루레이)

지아장커 감독에게 현대 중국은 뜨거운 용광로였다. 그의 작품 '천주정'(天注定, 2013년)을 보면 온통 분노로 이글거린다. 네 편의 이야기를 묶은 옴니버스 영화인 이 작품은 다양한 인간 군상이 각자의 분노를 표출하는 방식을 다루고 있다. 유일하게 네 번째 이야기만 등장인물이 분노하지 않는데 그의 막판 선택을 보면 오히려 관객에게 서글픔과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그런 점에서 실화를 바탕으로 한 네 편의 이야기는 모두 분노라는 한 바구니 안에 들어 있는 계란 같은 에피소드들이다. 지아장커 감독은 중국의 SNS인 웨이보에 올라온 여러 사건들을 보고 충격을 받아 이 영화를 구상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중국 사회 곳곳에서 일어난 엽기적인 사건들이 강성대국으로 달려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필연적 현상이라고 봤다. 즉 ..

국두 (블루레이)

장예모(장이머우) 감독은 '영웅' 이후 작품들로 정치색 논란에 휩싸였지만 이전 작품들에선 인간성 탐구라는 주제를 중국 전통문화와 훌륭하게 접목시켜 전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국두'(菊豆, 1990년)도 그런 작품이다. 내용은 1920년대 염색공방의 늙은 주인이 대를 잇기 위해 헐값에 사들인 젊은 처자 국두의 삶을 다뤘다. 늙은 남편의 성적 학대 속에 힘든 나날을 보내던 국두는 남편이 중풍으로 쓰러지자 염색공방에서 일하던 젊은 일꾼과 사랑을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태어난 염색공방의 대를 이을 아들은 남편이 아닌 일꾼의 아이다. 정작 국두는 모든 것을 접고 일꾼과 사랑에 빠지고 싶지만 철저한 유교적 가풍과 관습에 억눌려 이를 숨긴채 살아간다. 그 바람에 두 사람은 아슬아슬하면서도 가슴아픈 사랑을 이어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