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흑백영화 14

공포의 보수(블루레이)

프랑스의 앙리 조르주 클루조 감독에게 세상은 정글처럼 보였나 보다. 그가 만든 걸작 '공포의 보수'(Le Salaire De La Peur, 1953년)는 살아남기 위해 물고 뜯고 목숨을 걸며 허망한 싸움을 벌여야 하는 인간 군상들을 다뤘다. 내용은 볼리비아의 작은 도시 라스 피에도라스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뤘다. 보기에도 황량하고 열악한 이 작은 마을에 더 이상 갈 곳 없는 사람들이 몰려든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부랑자부터 전직 갱단원까지 굴러 들어와 살기 위해 일자리를 찾는다. 워낙 헐벗고 못 사는 곳이어서 마땅한 일자리는 석유 채굴을 위해 들어온 미국 석유회사뿐이다. 마침 유전에 거대한 화재가 발생해 실업자들에게 새로운 일자리가 생긴다. 석유회사에서는 불길이 거대하다 보니 도저히 사람의 힘으로 끄기..

잔 다르크의 수난(블루레이)

세계 영화사에 길이 남는 걸작인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 감독의 '잔 다르크의 수난'(La passion de Jeanne d'Arc, 1928년)은 참으로 기이하면서도 고통스러운 영화다. 흑백 무성영화로 촬영된 이 작품은 시종일관 배우들의 얼굴 표정에 천착한다. 배우들의 특별한 액션, 또는 와이드스크린으로 펼쳐지는 풍경이나 전경 샷이 등장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집요할 정도로 배우의 얼굴을 쫓아다니며 그들의 얼굴에 서린 분노, 슬픔, 절망과 희망, 용기, 공포를 담아낸다. 내용은 프랑스 하원 도서관에 보관된 잔 다르크의 재판기록을 토대로 재현한 잔 다르크의 최후다. 영국과 프랑스 간에 벌어진 백년전쟁 중 남장을 한채 프랑스군을 이끌어 점령군이었던 영국군을 물리친 잔다르크는 1431년 영국군에게 포로가 됐다...

프란시스 하 (블루레이)

노아 바움백 감독의 '프란시스 하'(Frances Ha, 2012년)는 뉴욕을 배경으로 한 누벨바그풍 영화다. 감독 자신이 프랑스의 누벨바그 영화를 지향한 만큼 이 영화는 모든 것이 1950년대 프랑스 영화계에 몰아쳤던 누벨바그 바람을 연상케 한다. 장 뤽 고다르, 프랑소와 트뤼포 등 누벨바그 기수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투영했듯이 이 작품은 27세 여성 프란시스를 통해 뉴요커의 일상을 담아냈다. 가진 것도 없고, 그렇다고 직업도 확실하지 않은 싱글 여성인 프란시스의 뉴욕 생활은 참으로 신산하다. 심지어 잘 곳 조차 변변히 없어 떠돌 정도로 어느 것 하나 보장되지 않는 그의 삶이지만 프란시스는 결코 실망하거나 힘든 내색을 하지 않는다. 시종일관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적극적으로 부닥치는 그의 모습..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아서야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아서야'(1934년)는 일본의 대표적 감독 오즈 야스지로가 만든 흑백 무성영화다. 배다른 형제를 사랑으로 키우는 어머니의 희생을 다룬 오즈의 초기 작품. 내용은 다소 도식적이다. 결코 쉽지 않은 가족 관계 속에서 오해와 갈등이 싹트지만 결국 어머니의 커다란 사랑을 깨닫고 다시 돌아온다는 설정을 식상하지 않게 만드는 것은 오즈 야스지로 감독 특유의 관조적 영상 덕분이다. 오즈 야스지로 감독은 말없이 묵묵히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는 어머니의 사랑과 자라면서 이를 깨닫는 형제의 모습을 특유의 잔잔한 영상으로 잘 담아 냈다. 언제나 그렇듯 오즈는 이 작품에서도 무심한 듯 빈 공간을 비추는 카메라 앵글을 통해 관조와 사색의 여백을 둔다. 새삼 80년전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세월을 뛰어넘어 가슴에..

의혹의 그림자

"악당은 완전히 검은색이 아니고, 영웅도 완전한 흰색이 아니다. 세상은 모두 회색이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은 이런 생각을 갖고 미스테리 스릴러 영화 '의혹의 그림자'(Shadow Of A Doubt, 1943년)를 만들었다. 실제로 영화 속 인물들은 이러한 이중성을 갖고 모호하게 처리됐다. 평화로운 작은 마을의 어느 가족에게 어느날 낯선 삼촌(조셉 코튼)이 찾아온다. 삼촌은 더 할 수 없이 친절하고 점잖은 신사지만,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살았는 지 아무도 모른다. 형사들이 삼촌의 뒤를 캐면서 여주인공 찰리(테레사 라이트)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빠진다. 결국 의문에 쌓인 삼촌의 정체와 마을의 이중성이 영화를 끌어가는 힘이다. 마을의 이중성은 "세상이 불결한 돼지우리라는 것을 아니? 세상은 지옥이야.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