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 최연진기자의 영화, 음악, 여행이야기 -

로만 폴란스키 6

나인스 게이트(블루레이)

로만 폴란스키(Roman Polanski) 감독의 '나인스 게이트'(The Ninth Gate, 1999년)는 이름값을 못하는 영화다. 명감독 로만 폴란스키와 유명한 촬영 감독 다리우스 콘지(Darius Khondji), 그리고 똑 부러지는 연기를 하는 조니 뎁(Johnny Depp)까지 면면이 화려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영화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연출이나 스토리텔링은 평범하고 촬영 또한 기억에 남을 만한 장면이 별로 없다. 조니 뎁 또한 엉성한 구성 속에 떠내려가는 뗏목처럼 소모돼 버렸다. 다리우스 콘지와 조니 뎁을 데리고 왜 이렇게 밖에 만들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아쉬움이 큰 작품이다. 굳이 이유를 찾는다면 난해한 원작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연출을 들 수 있다. 원작은 스페인의 움베르토 에코(U..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4K 블루레이)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감독상, 작품상을 놓고 경합을 벌인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Once Upon a Time... in Hollywood, 2019년)는 미국 현대사의 충격적인 사건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1969년 8월 9일에 찰리 맨슨 일당이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부인이자 여배우인 샤론 테이트를 잔혹하게 살해한 실화를 모티브로 삼았다. 미국을 떠돌던 찰리 맨슨 일당은 마약에 취해 샤론 테이트와 친구들을 다른 사람으로 오인해 총으로 쏘고 칼로 난도질을 해 죽였다. 당시 샤론 테이트는 임신 8개월이었다. 어려서부터 감옥을 들락거린 찰리 맨슨은 수감 시절 기타를 배워 1967년 출소한 뒤 작곡도 하고 노래도 열심히 불렀다. 그때 만든..

혐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혐오'(Repulsion, 1965년)는 카트린느 드뇌브가 이런 영화를 찍었나 싶을 만큼 그의 이미지를 바꿔놓은 작품이다. '쉘부르의 우산'에서 청순 가련한 여인의 모습을 보여준 그가 이 작품에서는 선병질적인 우울과 신경증에 시달리다가 자기 파멸로 치닫는 공포의 여인을 연기한다. '쉘부르의 우산'에서 매력 포인트였던 하얀 피부와 금발머리는 이 작품에서는 보호본능을 불러 일으키는 나약한 이미지와 비정상적인 파괴의 본능을 내재한 몬스터의 느낌을 전달한다. 그를 이렇게 바꿔놓은 것은 전적으로 폴란스키 감독의 그로테스트한 연출과 영상 구성 덕분이다. 작품의 내용은 제목처럼 병적으로 남성과 접촉을 꺼리는 여성의 이야기다. 애인과 키스를 하고 나서도 입술을 물로 씻어내고, 남자의 런닝 셔츠나..

피아니스트 (블루레이)

진실의 힘은 위대하다. 그렇기에 실화를 토대로 만든 영화는 그 어떤 드라마보다 커다란 울림을 준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The Pianist, 2002년)는 제 2 차 세계대전 당시 죽음의 문턱을 수 없이 넘긴 유명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로프 스필만의 실화다. 제 2 차 세계대전 발발 당시인 1939년 폴란드의 유명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던 스필만은 조국을 점령한 나치 독일에 의해 유대인 거주제한구역인 바르샤바 게토에 갇힌다. 그곳에서 가족들은 죽음의 트레블링카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최후를 맞고, 친구의 도움으로 도망친 그는 거지처럼 숨어 지내며 목숨을 연명한다. 그러던 어느날, 스필만은 하필 독일군 장교에게 발각되지만 음악을 좋아했던 장교는 스필만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그를 도와준다. 종전 ..

악마의 씨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수작 '악마의 씨'(Rosemary's Baby, 1968년)는 영화보다 책으로 먼저 만났다. 1970, 80년대 검은 색 표지가 특징이었던 손바닥만한 동서추리문고에서 '로즈마리 베이비'란 제목으로 출간됐다. 당시 읽기 힘든 세로쓰기 문고판인데도, 악마숭배자들이 평범한 여인을 유인해 악마의 자식을 임신하게 만드는 내용이 어찌나 충격적이던지 단숨에 읽었던 기억이 난다. 흥미진진한 이 작품을 쓴 주인공은 걸출한 추리소설 작가 아이라 레빈. 그는 많지 않은 작품을 썼지만 데뷔작 '죽음의 키스'부터 '브라질에서 온 소년들' '스텝포드 와이프'까지 모두 뛰어난 작품성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고 영화화됐다. 그의 두 번째 작품인 '악마의 씨'는 제목 그대로 악마 숭배자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하..